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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9/11 [책베끼기] 클라우제비츠 - 『전쟁론』-1) by trotz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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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끼기 작업을 진행한 [전쟁론]의 1편 1장의 두번째 업로드입니다... 마음에 드는 장이 두엇 더 있지만 당분간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군요. 교재일독 후 노트정리 작업에 시험직전에 따른 작업 등도 해야겠다 싶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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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여기에서 양극성의 원칙이 요구된다.


 한쪽 최고지휘관의 이해관계가 언제나 다른 쪽 최고지휘관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반대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참된 의미의 양극성이다. 아래에 이 원칙에 따로 하나의 장을 마련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점은 여기에서 말해야겠다.(그 장은 없습니다-옮긴이의 해설)

 양극성의 원칙은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서 양(陽)의 크기와 그 반대인 음(陰)의 크기가 정확히 상쇄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전투에서는 양쪽 모두 승리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참된 의미의 양극성이다. 왜냐하면 한쪽의 승리는 다른 쪽의 승리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에 공통적인 관계를 갖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사물이 있다면, 두 사물이 아니라 두 사물의 관계가 양극성을 갖는다.



16. 공격과 방어는 그 종류와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양극성을 적용할 수 없다.


 한 가지 형태의 전쟁만 있다면, 즉 공격만 있고 방어가 없다면 또는 공격과 방어가 단지 적극적인 동기를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데 따라서만 구분된다면, 싸움은 언제나 똑같을 것이다. 이런 싸움에서는 한쪽의 유리함은 언제나 똑같은 크기만큼 다른 쪽의 불리함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양극성이 존재할 것이다.

 전쟁은 공격과 방어라는 두 가지 형태의 활동으로 나뉜다. 아래에서 객관적으로 밝히겠지만 그것은 종류도 매우 다르고 강도도 같지 않다. 따라서 양극성은 양쪽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결전에 존재하는 것이며 공격과 방어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쪽 최고지휘관이 결전의 시기를 늦추려고 하면 다른 쪽 최고지휘관은 그것을 앞당기려고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싸움의 형태는 똑같다고 가정한다. A가 지금이 아니라 4주 후에 적을 공격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면, B는 4주 후보다는 지금 공격을 받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접적인 모순관계다. 하지만 이 모순으로부터 B가 A를 바로 지금 공격하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명백히 전혀 다른 문제다.



17. 방어가 공격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양극성의 효과는 없어지며 이로써 휴전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방어 형태가 공격 형태보다 유리하다면 나중에 결전을 치르는 데서 얻게 되는 한쪽의 장점이 방어를 하는 데서 얻게 되는 다른 쪽의 장점과 똑같을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모순관계로도 전자의 장점은 후자의 장점에 필적할 수 없으며 전쟁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 따라서 장점의 양극성이 갖는 추진력은 방어가 공격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효력을 잃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현재에 유리한 쪽이 방어의 장점을 버리기에 너무 약하다면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불리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에는 불리하겠지만 그래도 미래에 방어하면서 싸우는 것이 현재에 공격하거나 평화협정을 맺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방어의(방어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우월함은 대단히 크며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전쟁에서 일어나는 휴전은 대부분 방어의 우월함에서 비롯된다. 휴전이 생긴다고 해서 전쟁에 내적 모순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행동에 나서려는 동기가 약하면 약할수록 공격과 방어의 차이는 행동에 나서려는 동기를 그만큼 더 많이 흡수하고 중화시켜 휴전은 그만큼 더 자주 생길 것이다. 이는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18. 두 번째 이유는 상황에 대한 파악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전쟁행위를 멈추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상황에 대한 파악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모든 최고지휘관은 자기 군대의 상황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만 적의 상황은 불확실한 정보에 따라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잘못 판단할 수 있으며 이런 오류 때문에 실제로는 자신이 행동에 나서야 하는데 적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불충분한 상황 파악은 종종 적절하지 않은 때에 행동의 개시와 중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그래서 전쟁행위를 지연시키거나 앞당기는 데도 이바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오류는 언제나 전쟁행위를 내적 모순 없이 중지시킬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유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적의 힘을 과소평가하기보다는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반적으로 불완전한 상황 파악이 전쟁행위를 억제하며 완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쟁행위를 완화시켜 준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휴전의 가능성이 전쟁행위를 어느 정도 희석시키고 전쟁의 위험스러운 진행을 막으며 잃어버린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을 증대시키기 때문이다.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긴장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전쟁의 에너지가 크면 클수록 휴전기간은 그만큼 더 짧아질 것이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는 동기가 약하면 약할수록 휴전기간은 그만큼 더 길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동기가 강하면 의지력도 커지며, 잘 알다시피 의지력은 언제나 전투력의 구성요소이면서 동시에 전투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19. 전쟁에서 휴전이 자주 일어나면 전쟁은 절대성에서 더 멀어지며 개연성의 계산이 된다.


 전쟁행위가 느리게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리고 휴전이 자주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또한 휴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오류를 그만큼 더 일찍 바로잡을 수 있고 최고지휘관은 그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는 데 그만큼 더 자신만만해지며 그래서 그만큼 더 일찍 극단성의 뒤로 물러나서 모든 것을 개연성과 추측에 기댈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의 특성이 요구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따른 개연성의 계산이다. 대체로 전쟁이 느리게 진행되면 개연성을 계산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20. 여기에 우연만 더해지면 전쟁은 도박이 되는데 전쟁에는 대개 우연이 따른다.


 이상으로 알 수 있듯이, 전쟁의 객관적 성격이 전쟁을 개연성의 계산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쟁을 도박(Spiel, gamble)으로 만드는 데는 이제 단 하나의 요소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전쟁에는 확실히 이 요소가 없지 않은데 그것은 우연이다. 인간의 활동 중에서 전쟁만큼 그렇게 끊임없이 그리고 그렇게 광범위하게 우연과 관련되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전쟁에는 우연과 함께 운명과 행운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21. 전쟁은 그 성격상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도 도박이다.


 전쟁의 주관적 특성, 즉 전쟁을 수행하는 전투력으로 눈길을 돌리면 전쟁이 단순한 도박 이상으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전쟁활동이 일어나는 영역은 위험한 영역이다. 위험할 때 최고의 정신력은 무엇일까? 용기다. 물론 용기는 영리한 계산 능력과 조화를 이룰 수도 있지만, 이 둘은 종류가 다르며 서로 다른 정신능력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모험과 행운에 대한 믿음, 대담성이나 무모함은 용기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 모든 정신적 경향은 우연에 기댄다. 왜냐하면 우연도 그런 경향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절대적인 것, 이른바 수학적인 것은 전쟁술의 계산 어디에도 확고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전쟁에는 처음부터 가능성과 개연성, 행운과 불운이라는 도박성이 끼어든다. 이런 것들은 전쟁이라는 천의 크고 작은 모든 실(絲)에 얽혀 있으며 전쟁을 인간행위의 모든 영역 중에서 카드놀이와 가장 비슷한 것으로 만든다.



22. 카드놀이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정신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이성은 언제나 명확성과 확실성을 추구한다고 느끼지만 정신은 때때로 불확실성에 이끌린다고 느낀다. 정신은 친숙한 대상이 모두 자신을 떠난 것 같은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들어서야 할 때가 있다. 이 경우에 정신은 이성과 함께 철학적 탐구와 논리적 추론이라는 좁은 길을 헤치고 나가는 대신에 차라리 상상력을 품은 채 우연과 행운의 영역에 머문다. 정신은 철학적 탐구와 논리적 추론의 초라한 필연성 대신에 풍부한 가능성에 빠져든다. 여기서 감격을 받으며 용기는 고무되며, 그래서 용감한 수영선수가 급류에 뛰어드는 것처럼 정신은 모험과 위험에 뛰어든다.

 이론이 정신세계를 벗어나도 되는가? 그리고 절대적 결론과 법칙에 자만하면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가? 그렇다면 그런 이론은 인간의 삶에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론은 인간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하며 용기와 대담성, 심지어 무모함도 고려해야 한다. 전쟁술은 살아 있는 전투력이나 정신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성과 확실성에 결코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어디에나 우연이 들어설 여지는 남아 있다. 가장 큰 전쟁에도 가장 작은 전쟁에도 마찬가지다. 한쪽에 우연이 들어서면 다른 쪽에 용기와 자신감이 들어와서 틈을 메운다. 후자가 크면 그만큼 전자를 위한 여지가 커도 된다. 용기와 자신감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따라서 전쟁이론은 필수불가결하며 가장 고귀한 무덕(武德, kriegerische Tugend, military virtue) 이 모든 단계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는 법칙만을 세워야 한다. 모험에도 영리함과 신중함이 똑같이 들어 있지만 이것들은 단지 서로 다른 비율로 계산될 뿐이다.



23. 전쟁은 중대한 목적을 위한 진지한 수단이다. 목적에 대한 자세한 규정.


 지금까지 전쟁, 전쟁을 지휘하는 최고지휘관, 전쟁을 규정하는 이론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전쟁은 심심풀이도 아니고 모험과 성공을 쫓는 단순한 쾌락도 아니며 자유로운 열정의 산물도 아니다. 전쟁은 중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진지한 수단이다. 전쟁이 지니는 무지개 빛 행운, 전쟁에 들어 있는 변화무쌍한 열정과 용기, 환상과 감격, 이 모든 것들은 다만 전쟁의 수단이 갖는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민족 전체)의 전쟁, 특히 문명민족의 전쟁은 언제나 정치적인 상황에서 비롯되고 오로지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일어난다. 따라서 전쟁은 정치적인 행위다. 위에서 전쟁을 순수 개념으로부터 추론한 것처럼 전쟁이 방해를 받지 않는 완전한 행동이며 폭력을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라면, 전쟁은 정치 때문에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정치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정치의 자리를 대신하고 정치를 몰아내며 오로지 전쟁 자체의 법칙에만 따르게 될 것이다. 이는 지뢰를 준비해서 묻어 놓으면 그 지뢰는 더 이상 다른 방향으로 폭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와 전쟁 사이의 부조화 때문에 둘 사이에 일종의 이론적 구별이 생길 때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며 그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현실세계의 전쟁은 긴장 상태를 단 한 번의 폭발로 해결하는 극단적인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의 전쟁에서는 전투력이 활동하는데, 그 전투력은 완전히 똑같은 부류도 아니며 능력을 똑같이 발휘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타성과 알력이 빚어내는 저항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팽창하기도 하지만 다른 때에는 너무나 약해서 효과를 내지도 못한다. 그래서 현실세계의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폭력이 맥박을 치는 것과 같다. 한편으로는 얼마쯤 격렬하고 신속하게 긴장을 풀어 힘을 쓰기도 한다. 다시 말해 얼마쯤 신속하게 목표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 진행되는 중에 전쟁에 영향을 미치고 전쟁에 이런저런 방향을 제시하며 전쟁이 지혜로운 최고지휘관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일 걸리기도 한다. 전쟁이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쟁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동기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도 최우선으로 고려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목적이 전제군주처럼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목적은 전쟁수단의 성격과 맞아야 하고 이따금 그 수단 때문에 완전히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은 언제나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정치는 전쟁행위 전체를 꿰뚫고 지나가며 전쟁의 파괴력이 허락하는 한 전쟁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24.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접촉의 연속이며 정치적 접촉을 다른 수단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이제 전쟁에 고유한 특성이라고는 전쟁수단의 특성과 관련된 것뿐이다. 정치의 방향이나 의도가 전쟁수단과 모순에 빠지면 안 된다는 점은 일반적 차원에서는 전쟁술이, 그리고 개별적 차원에서는 최고지휘관이 요구할 것이다. 물론 이 요구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요구가 개별적인 경우에 정치적 의도에 아무리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이것은 언제나 정치적 의도를 제한할 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의도가 목적이고 전쟁은 수단이기 때문이며, 수단은 목적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어 원문 : Der Krieg ist eine bloße Fortsetzung der Politik mit andern Mitteln)

( 영어 : War is merely continuation of policy by other means.)



25. 전쟁의 다양성


 전쟁의 동기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강하면 강할수록 또한 민족의 생존 전체를 더 많이 포괄하면 할수록 그리고 전쟁에 앞서 나타나는 긴장이 폭력적으로 나타나면 날수록, 전쟁은 그만큼 더 추상적 형태에 가까워지고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그만큼 더 중요해지며 전쟁의 목표와 정치적 목적은 그만큼 더 일치하게 되고 전쟁은 그만큼 더 군사적으로 보이고 그만큼 덜 정치적으로 보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동기와 긴장이 약하면 약할수록, 전쟁요소인 폭력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방향은 정치가 제시한 노선으로부터 그만큼 더 멀어질 것이고 전쟁은 본래의 방향으로부터 그만큼 더 벗어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 목적은 이상적인 전쟁목표와 그만큼 더 많이 달라지고 전쟁은 그만큼 더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독자가 잘못된 생각에 빠지지 않게끔 여기에서 말해 둘 것이 있다. 전쟁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란 단지 철학적인 경향, 즉 엄밀한 논리적 경향만을 뜻하는 것이며 실제로 분쟁에 휘말려 있는 전투력의 경향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병사들의 모든 감정과 열정을 자연스러운 경향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많은 경우에는 병사들의 감정과 열정이 정치적인 방법으로는 억누르기 힘들 만큼 자극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모순은 생기지 않는데, 왜냐하면 병사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그 노력에 상응하는 대규모의 전쟁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이 작은 것만 지향하고 있을 때는 대중의 감정을 일으키려는 노력도 매우 작아질 것이며 그래서 대중은 억제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자극을 필요로 할 것이다.



26. 모든 전쟁은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요점으로 돌아가자. 정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전쟁이 있는 반면에 정치가 매우 분명하게 전면에 나타나는 전쟁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가지 종류의 전쟁은 똑같이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를 인격화한 국가의 이성이라고 간주하면 그 이성으로 파악해야 하는 상황 중에는 국제관계의 성격상 첫 번째 종류의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일반적 통찰이 아니라 폭력을 피하고 신중하며 교활하고 부정직하기까지 한 영리함이라는 관습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만 두 번째 종류의 전쟁이 첫 번째 종류의 전쟁보다 더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7. 이런 견해가 전쟁사를 이해하며 전쟁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서 생기는 결과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전쟁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도구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때만 모든 전쟁사와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전쟁사에 관한 방대한 책에 대한 이해가 열리게 된다. 둘째, 바로 이 견해는 전쟁의 동기와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전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정치가와 최고지휘관이 맨 처음으로 내려야 하는 가장 중요하며 결정적인 판단은 자신이 수행하는 전쟁을 이런 관점에서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며 상황의 성격으로 보아 실현될 수 없는 것은 전쟁으로 실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모든 전략 문제 중에서 가장 먼저 포괄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문제다. 아래에서 전쟁계획을 다룰 때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전쟁문제를 이 점까지 논의하여 앞으로 전쟁과 전쟁이론을 살펴보게 될 중요한 관점을 확립한 것으로 만족한다.



28. 이론을 위한 결론


 전쟁은 정말 카멜레온 같다. 왜냐하면 전쟁은 각각의 구체적인 경우마다 자신의 특성을 조금씩 바꾸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전쟁의 전체 형상에 따라 그리고 전쟁에 널리 퍼져 있는 경향과 관련해서 볼 때 기묘한 삼중성(三重性)을 띠기도 한다. 삼중성은 다음의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전쟁의 요소인 증오와 적대감의 원초적 폭력성인데 이는 맹목적 본능과 같다. 둘째, 개연성과 우연의 도박인데 이것은 전쟁을 자유로운 정신활동으로 만든다. 셋째, 정치적 도구라는 종속성인데 이로 말미암아 전쟁은 순수한 이성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는 주로 민족과 관련되고 두 번째는 주로 최고지휘관이나 군대와 관련되며 세 번째는 주로 정부와 관련되어 있다. 전쟁 중에 타오르는 열정은 이미 그 민족의 마음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우연이 따르는 개연성의 세계에서 용기와 재능이 발휘되는 범위는 최고지휘관과 군대의 특성에 달려 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은 오로지 정부에 속하는 문제다.

 이 세 가지 경향은 각각 매우 다른 법칙처럼 보이지만 모두 전쟁이라는 주제의 본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또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무시하거나 그들 사이에 임의의 관계를 세우려는 이론이 있다면, 그 이론은 즉시 현실과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래서 그런 이론은 이 모순만으로도 이미 폐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무게중심과도 같은 이 세 가지 경향 사이에서 전쟁이론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과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제 2편의 전쟁이론에서 살펴볼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 확립한 전쟁의 개념은 그 첫 번째 빛이 될 것이다. 그 빛은 우리에게 전쟁이론의 근본 구조를 밝혀 주고 전쟁이라는 큰 덩어리를 나누어 구별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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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otzky
10여 년 전 우연히 서점에서 한자 투성이의 소책자나 다름없던 책(일조각 판, 이 모씨의 번역)을 구해 읽으면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에 대한 재고에 일익을 담당했던, 바로 그 책의 1부의 완역본을 구해 읽다 보니 이전에 읽었을 때 그 책이 완전치 못했구나 하는 묘한 감정을 숨기기가 힘들었습니다. 분량도 분량이고 그 이해 안 가는 글 내용 등 말이죠.

아직 후속편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이 책만큼은 앞으로 재정 상태가 열악해지더라도 꼭 좁은 방 책꽂이에 꽂아놓고 두고두고 읽을 생각이라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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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편. 전쟁의 본질


제 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1. 머리말


어떤 문제를 다룰 때는 먼저 하나의 요소를, 다음으로 그 요소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부분이나 부문을, 마지막으로 전체의 내적 연관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즉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다른 문제와 달리 전쟁에서는 먼저 전체의 본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는 부분과 전체를 늘 함께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2. 정의(定議)


여기서는 전쟁에 관해 여론에 따르는 느려 터진 정의에 따르지 않고 곧바로 전쟁의 구성요소인 결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렇게 보면 전쟁이란 대규모의 결투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수많은 결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하나의 단위라고 생각하면 결투를 벌이는 두 사람을 떠올리는 게 좋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물리적 폭력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의 직접적인 목적은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며 이로써 상대방이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나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다.


폭력은 폭력에 맞서기 위해 기술과 과학의 발명품들로 무장해 왔다. 폭력에는 국제법상의 관례라는 이름으로 제한이 따르지만, 그 제한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거의 언급할 만한 가치도 없어서 폭력의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따라서 폭력, 즉 물리적 폭력은(정신적 폭력은 국가와 법률이라는 개념의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단(Mittel, means)이며 적에게 나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목적(Zweck, object)이다. 이 목적을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이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개념상 전쟁행위의 본래의 목표(eigentliches Ziel, true aim)가 된다. 그런데 요즘에는 목표가 목적을 대신하고 목적을 전쟁 자체에 속하지 않는 문제라며 몰아내 버린다.



3. 극단적 폭력


그런데 박애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많은 부상자를 내지 않으면서 인위적으로 적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전쟁술(戰爭術, Kriegskunst, art of war)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해도 이런 오류는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쟁과 같은 위험한 일에서 선량함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나쁜 잘못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성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피를 흘려 가면서 무자비하게 폭력을 쓰는 쪽은 폭력을 쓰지 않는 쪽보다 우세해질 것이 틀림없다. 이로써 한쪽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에 따르도록 강요하고 양쪽의 폭력은 극에 달할 때까지 상승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폭력에 내재하는 힘의 균형 외에 다른 한계는 없을 것이다.

전쟁은 위와 같이 보아야 하며, 전쟁의 잔인함을 혐오한다고 해서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려 한다면 이는 쓸데없는 생각이며 잘못된 노력이 될 것이다.

미개민족 간의 전쟁이 문명민족 간의 전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파괴적이라면, 이는 국가 내부는 물론 국가 간의 관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상황 때문이다. 이런 사회상태와 국가 간의 관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쟁을 제한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나 국가 간의 관계는 전쟁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며 전쟁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지 않고는 온건주의를 전쟁이론(Philosophie des Krieges, theory of war)에 결코 끌어들일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싸움에는 본래 적대적 감정(Gefühl, feelings)과 적대적 의도라는 두 개의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나의 개념 정의는 이 두 개의 요소 가운데 후자의 특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더 일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장 난폭하며 본능에 가까운 증오의 감정은 적대적인 의도 없이는 생각할 수 없지만, 이와 달리 적대감정이 전혀 없는 적대적 의도나 강력한 적대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적대적 의도는 많이 있다. 미개민족에게는 감성에 딸린 의도가 주로 나타나며 문명민족에게는 이성에 딸린 의도가 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야만과 문명 자체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야만과 문명에 따르는 여러 가지 상황과 제도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결국 이 차이는 모든 경우마다 반드시 나타나는 차이는 아니며 단지 대부분의 경우에 나타날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문명화된 민족의 싸움도 격렬하게 불타오를 수 있다.

따라서 문명민족 간에 일어나는 전쟁을 단순히 정부 간의 이성적 행위 때문이라고 하거나 일체의 열정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전쟁에는 수많은 물리적 전투력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양쪽의 전투력의 비율만 비교하면 될 것이며, 전쟁은 일종의 행위의 대수학이 되고 말 것이다.

전쟁이론이 이미 이런 대수학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최근의 전쟁 양상은 그런 이론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고 있다. 전쟁이 폭력행위라면 전쟁에는 당연히 감정이 따르게 마련이다. 전쟁이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감정은 전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는 문명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이해관계의 중대성과 기간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문명민족은 포로를 죽이지 않으며 도시와 농촌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민족의 지성이 전쟁에 더 많이 개입하고 그 민족에게 본능을 거칠게 표현하기보다는 폭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화약의 발명과 무기의 지속적인 개선은 전쟁 개념에 들어 있는 경향, 즉 적을 무찌른다는 경향이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전혀 방해 받지 않았으며 다른 방향으로 바뀌지도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명제를 반복하겠다. 전쟁은 폭력행위이며 폭력을 쓰는 데는 한계가 없다. 그래서 각자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에 따를 것을 강요한다. 여기에서 상호작용이 생기는데, 이것은 개념상 극단까지 치닫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치는 첫 번째 상호작용이며 첫 번째 극단이다.

(첫 번째 상호작용)



4. 목표는 적이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에서 적이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전쟁행위의 목표라고 말했다. 이제 이것이 이론적으로도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나의 의지에 따르도록 적을 강요하려면 내가 적에게 요구하는 희생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 적을 빠뜨려야 한다. 또한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이 적어도 겉으로 볼 때 일시적인 것이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적은 더 나은 때를 기다리면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계속되는 전쟁행위로 적의 상황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건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지금보다 더 불리한 상황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전쟁당사자가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행위로 적을 나의 의지에 따르도록 강요하려면 적이 사실상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될 가능성 때문에 위협을 느끼는 상태에 빠뜨려야 한다. 이로부터 적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언제나 전쟁행위의 목표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전쟁은 살아 있는 세력이 죽은 집단과 싸우는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절대적 무저항은 전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살아 있는 두 세력 간의 충돌이다. 전쟁행위의 궁극적 목표(letztes Ziel, ultimate aim)라고 말한 건 양쪽 당사자에게 모두 해당된다. 따라서 여기에도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내가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적이 나를 쓰러뜨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의[2판: 내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하며, 내가 적에게 했던 것처럼 적이 나에게 그들 자신의 뜻을 강요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의 극단으로 이끄는 두 번째 상호작용이다.

(두 번째 상호작용)



5. 최대한의 병력


적을 물리치려면 우리의 힘을 적의 저항능력에 맞춰야 한다. 적의 저항능력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적이 갖고 있는 모든 수단이며 다른 하나는 강력한 의지력이다.

적이 갖고 있는 수단은(전부는 아니더라도) 셀 수 있기 때문에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지력을 측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그것은 대략 전쟁의 동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적의 저항 능력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에 따라 우리의 전투력을 측정하여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갖추든가 또는 그만한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가능한 한 병력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적도 똑같이 할 것이며 따라서 상호 간에 새로운 상승작용이 생긴다. 이는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또 다시 극단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마주치는 세 번째 상호작용이며 세 번째 극단이다.

(세 번째 상호작용)



6. 현실적 제한


순수한 개념의 추상적 영역에서 생각하는 이성은 극단에 이를 때까지 결코 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이성은 극단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의 내적 법칙 외에 다른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힘의 충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내놓아야 하는 목표와 우리가 이용해야 하는 수단에 대한 절대적 조건을 전쟁의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추론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위에서 말한 끊임없는 상호작용 때문에 극단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극단성이란 거의 보이지 않는 논리적 궤변이 만들어 낸 관념의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인 조건에 매달려 현실세계의 모든 어려움을 한 순간에 피해 버린다면 그리고 매번 극단성에 사로잡혀 최대한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을 논리적 엄밀성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단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세계에서 아무런 효력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최대한의 병력을 갖추는 것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절대성이라고 가정해도 인간의 정신은 이런 논리적 환상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쓸데없는 병력의 낭비가 생길 텐데, 그런 낭비는 정부의 다른 정치적 원칙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할 텐데, 그런 의지는 이미 내놓은 전쟁목적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생겨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논리적 궤변으로는 결코 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상에서 현실로 넘어오면 모든 것이 다르게 전개된다. 추상에서는 낙관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쪽이 완전성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실현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현실에서도 그렇게 될까?

1. 전쟁이 갑자기 일어나며 과거의 정치세계와 무관한 완전히 고립된 행위라면,

2. 전쟁이 단 한 번의 결전이나 동시에 일어나는 결전(決戰, Entscheidung, decisive act))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3. 전쟁에 그 자체로 완료되는 결전이며 전쟁에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이 정치적 계산을 통해서 전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7. 전쟁은 결코 고립된 행위가 아니다.


위의 첫 번째 조건과 관련해서 보면 전쟁을 하는 양쪽 중에서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추상적인 존재가 나인다. 저항능력을 이루는 요소 중에서 의지는 외적인 사정에 근거를 두지 않는데 이 의지와 관련해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의지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오늘의 의지에서 내일의 의지를 알 수 있다. 전쟁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으며 순간적으로 확대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양쪽은 대부분 상대방의 현재의 상태와 행동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미래의 모습과 행동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절대적 완전성에 이르지 못하며 양쪽 모두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결점이 일종의 온건주의가 되어 나타난다.



8. 전쟁은 단 한 번의 순간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두 번째 조건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살펴볼 계기가 된다.

전쟁에서 결전이 하나뿐이거나 또는 여러 개라도 동시에 일어난다면 모든 전쟁 준비는 당연히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놓친 기회는 결코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적의 전쟁 준비만이 우리의 준비를 위한 척도(Maßstab, criterion)가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시 추상의 영역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결전이 몇 번의 연속적인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면 먼저 일어난 행위의 모든 현상은 자연히 나중에 일어날 행위를 위한 기준(Maßgauge)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현실세계는 추상세계를 대신하고 극단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줄여 줄 것이다.

적과 싸우는 데 쓰기로 정해진 수단을 모두 한꺼번에 투입하거나 투입할 수 있다면 모든 전쟁은 불가피하게 단 한 번의 결전이나 동시에 일어나는 몇 번의 결전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의 결전이 불리하게 진행되면 적과 싸울 수단이 불가피하게 줄어들기 때문이며, 첫 번째 결전에서 모든 수단을 다 써 버렸다면 두 번째 결전은 사실상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전쟁행위는 본질적으로 첫 번째 전쟁의 일부이며 사실상 그것을 계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전쟁의 준비 단계부터 현실세계가 순수 개념을 대신하며 현실적 척도가 극단적 가정을 대신한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양쪽의 상호작용은 극단적 노력이라는 수준 뒤로 물러날 것이며 양쪽은 모든 힘을 한꺼번에 투입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힘이 동시에 효과를 낼 수 없는 것은 바로 힘의 성격과 사용 방법 때문이다. 여기서 힘(Kräfte, resources)이란 본래의 전투력(Streitkräfte, fighting forces), 나라(Land, country)의 면적과 인구 그리고 동맹국을 말한다.

나라의 면적과 인구는 본래의 전투력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나라는 그 자체로 전쟁이 일어나는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부분이란 전쟁터에 속하거나 전쟁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부분만을 말한다.

아마 움직이는 전투력은 모두 동시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전쟁행위가 나라 전체를 포괄할 수 있을 만큼 그 나라가 작은 나라가 아니라면 모든 성(城)이나 강, 산이나 주민 등과 같이 나라 전체는 동시에 투입할 수 없다. 게다가 동맹국의 협력도 전쟁 당사국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관계의 성격 상 동맹국은 종종 한참 지나고 나서야 참전하거나 깨진 균형을 회복하는 데 투입된다.

즉각 효력을 낼 수 없는 이런 저항능력은 대부분의 경우에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저항능력은 대규모의 첫 번째 결전이 일어나 힘의 균형이 심하게 깨진 곳에서도 이 균형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힘을 동시에 그리고 완벽하게 하나로 모으는 것은 전쟁의 본질과 상반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이 사실 자체가 첫 번째 결전을 치르기 위한 커다란 노력을 누그러뜨리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리하게 끝나는 결전은 언제나 손해가 되는 법이며 누구도 자신을 일부러 그런 불리함에 노출시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첫 번째 결전이 곧바로 마지막 전투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첫 번째 결전의 규모가 클수록 그것이 나중의 전투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가 나중에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인간의 정신은 첫 번째 전투에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데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며 다른 때처럼 첫 번째 전투에 모든 힘을 모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양쪽 중에서 어느 한쪽이 힘의 약세 때문에 전투를 중지한다면 이는 상대방의 노력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객관적인 이유가 되며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노력은 다시 적당한 선으로 축소된다.



9. 전쟁의 결과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조건을 보면, 전쟁 전체의 승패가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언제나 절대적인 결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싸움에서 패배한 국가는 패배를 종종 일시적인 불행으로 여길 뿐이며 나중에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 불행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이 그 국가의 강한 긴장과 격렬한 노력을 누그러뜨릴 것은 자명하다.



10. 현실세계의 개연성이 개념의 극단성과 절대성을 대신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전쟁행위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힘의 엄격한 법칙이 사라지게 된다. 극단성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않는다면 극단성 대신에 극단적인 노력의 한계를 밝히는 판단만 남는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현실세계의 현상이 제공하는 자료와 개연성의 법칙에 따를 때만 가능해진다. 서로 싸우는 양쪽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국가이며 정부라면 그리고 전쟁이 더 이상 관념적인 행위가 아니라 독특한 형태로 진행되는 행동이라면, 현실세계의 사실이 앞으로 발견해야 한다고 기대할 수 있는 미지의 것에 관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양쪽은 각자 적의 성격이나 시설, 상태나 조건으로부터 개연성의 법칙에 따라 상대방의 행위를 추론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결정한다.



11. 이제 다시 정치적 목적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위에서(제2절) 빼놓았던 주제를 여기에서 다시 살펴봐야겠다. 그 주제란 전쟁의 정치적 목적이다. 지금까지는 극단성의 법칙, 즉 적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쓰러뜨린다는 의도가 전쟁의 정치적 목적을 거의 삼켜버렸다. 극단성의 법칙이 효력을 잃고 적을 쓰러뜨린다는 의도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되자, 전쟁의 정치적 목적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든 생각이 몇몇 사람과 조건으로부터 나오는 개연성의 계산이라면 전쟁의 본래의 동기인 정치적 목적은 이 계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적에게 요구하는 희생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에게 대항하는 적의 노력도 그만큼 더 적어지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의 노력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의 노력도 그만큼 더 적어질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정치적 목적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가 그 목적에 두는 가치도 그만큼 더 적어질 것이며 그 목적을 그만큼 더 일찍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노력도 그만큼 더 적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의 본래의 동기인 정치적 목적이 전쟁행위로 이루어야 하는 목표는 물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위해서도 척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은 그 자체로는 척도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순수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은 전쟁 중인 두 국가의 관계에서만 척도가 될 수 있다. 똑같은 정치적 목적도 민족에 따라서 그리고 똑같은 민족이라도 시대에 따라서 매우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목적이란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때만 척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래서 대중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다. 대중의 행동을 강화하느냐 또는 약화시키느냐에 따라 거기에서 나오는 결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두 민족과 국가 사이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긴장이 생길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매우 작은 정치적 동기가 그 자체로 전쟁의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효과, 즉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정치적 목적이 두 국가에 불러일으키는 노력에도 적용되며 정치적 목적이 전쟁행위에서 정하는 목표에도 적용된다. 때때로 정치적 목적 자체가 전쟁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정 지역을 정복할 경우가 그렇다. 또한 때때로 정치적 목적 자체가 전쟁행위의 목표를 정하는데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목적과 똑같은 가치를 지니며 평화시에 정치적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관련된 국가들의 특성에 대한 고려는 늘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똑같은 가치를 지닌 다른 것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등가물이 정치적 목적보다 훨씬 더 커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대중의 태도가 싸늘하면 싸늘할수록, 게다가 두 국가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긴장이 약하면 약할수록 정치적 목적은 그만큼 더 중요하며 결정적인 척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목적이 거의 혼자 결정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정치적 목적이 전쟁의 목표와 똑같다면 정치적 목적이 갖는 가치는 일반적으로 목표와 함께 줄어들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목적이 전쟁에서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더욱 더 그렇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섬멸전쟁부터 단순한 무장관측에 이르기까지 온갖 단계의 중요성과 에너지를 갖는 전쟁이 내적 모순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자명해진다. 이는 다른 종류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아래에서 분석하고 설명할 것이다.



12. 휴전은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양쪽의 정치적 요구가 아무리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그리고 내놓은 수단이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또한 양쪽이 전쟁에서 정하는 목표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전쟁행위가 한 순간이라도 멈출 수 있을까? 이는 문제의 본질에 깊이 파고드는 물음이다.

어떤 행동이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데, 이를 행동의 기간이라고 부르겠다. 행동하는 사람이 서두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기간은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

여기서 서두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다.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한다. 느린 사람은 더 많은 시간을 쓰려고 일을 천천히 하는 게 아니다. 그의 성격상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일을 망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간은 그의 내적인 이유에 달린 문제이며 행동을 하는 실제 기간이 된다.

그런데 전쟁의 모든 행동에서 이 기간을 인정하면 얼핏 볼 때 이 기간 이외의 모든 시간 낭비, 즉 전쟁행위에서 일체의 휴전은 모순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양쪽 가운데 어느 한쪽의 진행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진행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3. 행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인데 그건 늘 한쪽에만 있는 것 같다


양쪽이 서로 싸울 준비를 한다면 어떤 적대적 원칙이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시켰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무장을 하고 있는 한, 즉 평화조약을 맺지 않는 한 이 원칙은 남아 있을 것이다. 양쪽은 모두 단 하나의 조건 아래에서만 전투를 중지할 수 있는데, 그건 행동하는 데 더 유리한 때를 기다리려고 하는 경우다. 얼핏 보면 이 조건은 늘 한쪽에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다른 쪽은 저절로 그 반대의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한쪽이 행동하는 데 관심을 보인다면 다른 쪽은 기다리는 데 관심을 가질 게 틀림없다.

힘의 완전한 균형이 휴전을 가져오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적극적인 목적을 갖는 쪽이(공격자) 먼저 공격에 나설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목적과 더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는 쪽이 그와 동시에 더 약한 전투력을 갖고 있는 것을 균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동기와 전투력의 곱하기에서 일종의 방정식이 생긴다면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균형상태에서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면 양쪽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이며,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 변화는 어느 한쪽에만 유리해서 다른 쪽은 행동에 나설 것이 틀림없다. 균형의 개념은 휴전을 설명할 수 없으며 결국 균형이란 좀 더 유리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된다. 두 국가 중에서 한 국가가 적극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면 그 국가가 적의 한 지역을 점령해서 평화시에도 그 점령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경우다. 점령을 하고 나면 그 국가의 정치적 목적은 이루어진 셈이고 행동할 필요는 사라지며 그 국가에 평온이 찾아온다. 적이 이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그 국가는 적과 평화조약을 맺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적이 행동에 나설 것이다. 적이 전투를 잘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