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도 전철역 한 정거장 거리를 걷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지루해 하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오늘 퇴근길은 왜 그리도 바람이 차가운지 모르겠더군요.

 ...네, 저 지금 다니는 학원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퇴근 준비를 마치고 막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부원장님이 이야기를 하자더군요. 지난 번 강의평가 때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을 서로 알고 있기에 그 표정을 보면서 무언가 낌새가 이상함을 알아챘음에도 혹시나 하고 따라들어갔는데...
  지난 1학기 때 평가도 좋지 않았는데 이번(아마 2학기 중간고사 때)에도 좋지 않게 나왔다, 학부모와의 상담에 적극적이지가 않다, (아이들 중에도 호오가 뚜렷이 나뉘어지는지) 선생님과 아이들 간에 수준이 맞지 않는다 등등... 학생 및 학부모들에 대한 관리가 수업능력보다 오히려 더 크게 작용하는 중등부의 스타일과 제 스타일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오는 19일 전에 운신의 길을 다르게 모색함이 좋겠다고 하시더라는.....................
  한 시간 가까이 퇴근을 늦추어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결국 입에 발린 말이겠지만 제 스타일은 고등부 수업에 오히려 최적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다른 관이나 내부 고등부에서도 인사적체가 벌어지고 있어 쓸 자리가 없다. 거기에 중등부 강사진들은 거의 2/3 이상이 여자 선생님들이기에 오히려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남자 선생님이 손해보는 구조다(어느 정도 뒷담화가 나왔을 것임을 짐작케 함...)... 아쉽지만 나가줘야겠다, 남아 있는 급여는 (퇴직금조로 학원에 깔아둔 것까지) 칼같이 정산해 주겠다, 현재 강사 시장에서 내 나이나 성별, 스타일 등은 중등부에 걸맞지 않고 언제고 한계에 다다를 수 있으니 차라리 고등부 쪽을 노려 봄이 좋겠다, 여기서 수업에 시달리면서 연구한댔자 몸만 더 축날 테니 확실하게 노려 보시라, 내가 가진 스타일로는 적극적인 도전 자세만 갖춘다면 고등부 수업으로 충분히 활로를 뚫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아직 2주 정도의 기간이 남아 있으니 아이들 시험직전보강만 깔끔히 해 주면서 다른 자료도 공부하고 준비를 하면서 도전하시라... 내부 결정으로는 계약해지, 즉 해고인 셈이지만 다른 선생님들에게 질문이 올 때는 자진퇴사의 형식으로 이야기해 달라... (연말에 어학원 쪽으로 옮기기로 이미 선을 잡아놓으신 옆자리 영어 선생님과는 퇴근길에 문자와 통화를 통해 이야기를 해 버렸다죠. 어차피 떠날 사람들인데... 그분은 제가 짤릴 것이라고 생각을 못해서였는지 본인이 짤리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시더라는-그래도 상관없도록 운신을 해 놓으신 것이 부럽기도 하고)

  역시... 아니었나 봅니다. 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고 다양하고 어려워요. 강사일이 역시 수업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실감하네요. 더구나 중등부에서는 특히... 감수성 예민한 여자아이들 중 일부에게 특히 밉보였겠죠. 점수가 제일 안 나오는 녀석들에게 더욱. 그런 면에서는 책임을 통감해야겠죠. 내 좋은 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찌 되었건 또 한 번 중요한 것은 실력이구나를 곱씹게 돼요. 처세와 비위맞추기(윗사람들과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 아이들, 학부모들, 뒤에서 나를 뒷담화 안주감으로 세울 몇몇 강사들과의 사이에서) 그리고 중등부 레벨에 수업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업무가 된 상담 등.....................

  지난 해 12월 4일 이곳에서의 첫 수업을 시작해서 딱 1년하고 하루가 지난 다음 날의 이야기였습니다. 한 정거장 거리를 쌀쌀한 바람을 옷깃으로 막으면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오더군요. 구슬픈 노랫가락도 흘러 나오고... 날이 추워 눈가에 이슬이 맺힐라치면 얼려버리는 통에 정작 서글픈 마음이 들 여유가 없었다고나 하면 사치스러움이려나요.
  방에 돌아온 후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없이 이번에는 신경쓰지 말자고 다운해 놓지 않았던 수능 사회 영역의 과목별 문제들을 내려받았습니다. 출근하고 나서 출력해서 좀 읽어야죠. 고등부 사회탐구를 수업할 수 있으려면 제가 잘 하는 역사 부문만 가지고는 경쟁력이 딸릴지도 모르니까요. 이력서 파일도 수정하고 면접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 필요한 것도 알아봐야겠네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업무상) 남을 도와주는 쪽은 피해야 하려나도 싶어요. 진짜 무섭게 자기 이득만 챙겨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슬몃슬몃 올라오려고 하네요.

  그건 그렇고 심판일 쉬겠다는 언질을 해 놓은 상태에 뭔가 다른 것에도 좀 빠져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나하나 실천해 가려는데 생겨난 이 분기점의 상황... 도대체 행동을 어떻게 취해야 할까요? 주역점이라도 쳐야 하나?

  이곳에서 1년 간 받아놓은 급여들 중 지른 것이 꽤 되는군요. 뭐 눈에 남는 것은 거의 책들 뿐이지만(자기계발서 같은 것은 한 권도 없다는 것이 이럴 때 자랑이 되야 하는지,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통장 잔고가 부모님 생활비에 보험비에 방값 등 버틸 만하다 싶으면 두세 달 정도 여유있게 공부하면서 대비라도 했으면 싶은데 어떨런가도 싶어요. 그래도 일 년은 더 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다른 학원들 구인광고는 뇌리에 두지 않았는데 갑자기 로그인해서 찾아보는 것도 생경하고.
  이제부터 남은 날들 동안 짐을 챙겨서 가져와야 할 터인데 고민은 고민이네요. 쓸데업이 사놓은 것만 많은 셈이니... 아무리 눈에 안 띄게 피하고 또 피해도 결국은 표가 나겠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trotz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