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우연히 서점에서 한자 투성이의 소책자나 다름없던 책(일조각 판, 이 모씨의 번역)을 구해 읽으면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에 대한 재고에 일익을 담당했던, 바로 그 책의 1부의 완역본을 구해 읽다 보니 이전에 읽었을 때 그 책이 완전치 못했구나 하는 묘한 감정을 숨기기가 힘들었습니다. 분량도 분량이고 그 이해 안 가는 글 내용 등 말이죠.

아직 후속편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이 책만큼은 앞으로 재정 상태가 열악해지더라도 꼭 좁은 방 책꽂이에 꽂아놓고 두고두고 읽을 생각이라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

제 1편. 전쟁의 본질


제 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1. 머리말


어떤 문제를 다룰 때는 먼저 하나의 요소를, 다음으로 그 요소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부분이나 부문을, 마지막으로 전체의 내적 연관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즉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다른 문제와 달리 전쟁에서는 먼저 전체의 본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는 부분과 전체를 늘 함께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2. 정의(定議)


여기서는 전쟁에 관해 여론에 따르는 느려 터진 정의에 따르지 않고 곧바로 전쟁의 구성요소인 결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렇게 보면 전쟁이란 대규모의 결투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수많은 결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하나의 단위라고 생각하면 결투를 벌이는 두 사람을 떠올리는 게 좋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물리적 폭력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의 직접적인 목적은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며 이로써 상대방이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나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다.


폭력은 폭력에 맞서기 위해 기술과 과학의 발명품들로 무장해 왔다. 폭력에는 국제법상의 관례라는 이름으로 제한이 따르지만, 그 제한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거의 언급할 만한 가치도 없어서 폭력의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따라서 폭력, 즉 물리적 폭력은(정신적 폭력은 국가와 법률이라는 개념의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단(Mittel, means)이며 적에게 나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목적(Zweck, object)이다. 이 목적을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이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개념상 전쟁행위의 본래의 목표(eigentliches Ziel, true aim)가 된다. 그런데 요즘에는 목표가 목적을 대신하고 목적을 전쟁 자체에 속하지 않는 문제라며 몰아내 버린다.



3. 극단적 폭력


그런데 박애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많은 부상자를 내지 않으면서 인위적으로 적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전쟁술(戰爭術, Kriegskunst, art of war)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해도 이런 오류는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쟁과 같은 위험한 일에서 선량함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나쁜 잘못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성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피를 흘려 가면서 무자비하게 폭력을 쓰는 쪽은 폭력을 쓰지 않는 쪽보다 우세해질 것이 틀림없다. 이로써 한쪽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에 따르도록 강요하고 양쪽의 폭력은 극에 달할 때까지 상승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폭력에 내재하는 힘의 균형 외에 다른 한계는 없을 것이다.

전쟁은 위와 같이 보아야 하며, 전쟁의 잔인함을 혐오한다고 해서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려 한다면 이는 쓸데없는 생각이며 잘못된 노력이 될 것이다.

미개민족 간의 전쟁이 문명민족 간의 전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파괴적이라면, 이는 국가 내부는 물론 국가 간의 관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상황 때문이다. 이런 사회상태와 국가 간의 관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쟁을 제한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나 국가 간의 관계는 전쟁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며 전쟁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지 않고는 온건주의를 전쟁이론(Philosophie des Krieges, theory of war)에 결코 끌어들일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싸움에는 본래 적대적 감정(Gefühl, feelings)과 적대적 의도라는 두 개의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나의 개념 정의는 이 두 개의 요소 가운데 후자의 특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더 일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장 난폭하며 본능에 가까운 증오의 감정은 적대적인 의도 없이는 생각할 수 없지만, 이와 달리 적대감정이 전혀 없는 적대적 의도나 강력한 적대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적대적 의도는 많이 있다. 미개민족에게는 감성에 딸린 의도가 주로 나타나며 문명민족에게는 이성에 딸린 의도가 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야만과 문명 자체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야만과 문명에 따르는 여러 가지 상황과 제도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결국 이 차이는 모든 경우마다 반드시 나타나는 차이는 아니며 단지 대부분의 경우에 나타날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문명화된 민족의 싸움도 격렬하게 불타오를 수 있다.

따라서 문명민족 간에 일어나는 전쟁을 단순히 정부 간의 이성적 행위 때문이라고 하거나 일체의 열정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전쟁에는 수많은 물리적 전투력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양쪽의 전투력의 비율만 비교하면 될 것이며, 전쟁은 일종의 행위의 대수학이 되고 말 것이다.

전쟁이론이 이미 이런 대수학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최근의 전쟁 양상은 그런 이론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고 있다. 전쟁이 폭력행위라면 전쟁에는 당연히 감정이 따르게 마련이다. 전쟁이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감정은 전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는 문명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이해관계의 중대성과 기간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문명민족은 포로를 죽이지 않으며 도시와 농촌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민족의 지성이 전쟁에 더 많이 개입하고 그 민족에게 본능을 거칠게 표현하기보다는 폭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화약의 발명과 무기의 지속적인 개선은 전쟁 개념에 들어 있는 경향, 즉 적을 무찌른다는 경향이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전혀 방해 받지 않았으며 다른 방향으로 바뀌지도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명제를 반복하겠다. 전쟁은 폭력행위이며 폭력을 쓰는 데는 한계가 없다. 그래서 각자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에 따를 것을 강요한다. 여기에서 상호작용이 생기는데, 이것은 개념상 극단까지 치닫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치는 첫 번째 상호작용이며 첫 번째 극단이다.

(첫 번째 상호작용)



4. 목표는 적이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에서 적이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전쟁행위의 목표라고 말했다. 이제 이것이 이론적으로도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나의 의지에 따르도록 적을 강요하려면 내가 적에게 요구하는 희생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 적을 빠뜨려야 한다. 또한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이 적어도 겉으로 볼 때 일시적인 것이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적은 더 나은 때를 기다리면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계속되는 전쟁행위로 적의 상황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건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지금보다 더 불리한 상황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전쟁당사자가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행위로 적을 나의 의지에 따르도록 강요하려면 적이 사실상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될 가능성 때문에 위협을 느끼는 상태에 빠뜨려야 한다. 이로부터 적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언제나 전쟁행위의 목표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전쟁은 살아 있는 세력이 죽은 집단과 싸우는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절대적 무저항은 전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살아 있는 두 세력 간의 충돌이다. 전쟁행위의 궁극적 목표(letztes Ziel, ultimate aim)라고 말한 건 양쪽 당사자에게 모두 해당된다. 따라서 여기에도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내가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적이 나를 쓰러뜨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의[2판: 내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하며, 내가 적에게 했던 것처럼 적이 나에게 그들 자신의 뜻을 강요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의 극단으로 이끄는 두 번째 상호작용이다.

(두 번째 상호작용)



5. 최대한의 병력


적을 물리치려면 우리의 힘을 적의 저항능력에 맞춰야 한다. 적의 저항능력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적이 갖고 있는 모든 수단이며 다른 하나는 강력한 의지력이다.

적이 갖고 있는 수단은(전부는 아니더라도) 셀 수 있기 때문에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지력을 측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그것은 대략 전쟁의 동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적의 저항 능력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에 따라 우리의 전투력을 측정하여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갖추든가 또는 그만한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가능한 한 병력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적도 똑같이 할 것이며 따라서 상호 간에 새로운 상승작용이 생긴다. 이는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또 다시 극단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마주치는 세 번째 상호작용이며 세 번째 극단이다.

(세 번째 상호작용)



6. 현실적 제한


순수한 개념의 추상적 영역에서 생각하는 이성은 극단에 이를 때까지 결코 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이성은 극단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의 내적 법칙 외에 다른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힘의 충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내놓아야 하는 목표와 우리가 이용해야 하는 수단에 대한 절대적 조건을 전쟁의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추론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위에서 말한 끊임없는 상호작용 때문에 극단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극단성이란 거의 보이지 않는 논리적 궤변이 만들어 낸 관념의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인 조건에 매달려 현실세계의 모든 어려움을 한 순간에 피해 버린다면 그리고 매번 극단성에 사로잡혀 최대한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을 논리적 엄밀성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단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세계에서 아무런 효력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최대한의 병력을 갖추는 것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절대성이라고 가정해도 인간의 정신은 이런 논리적 환상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쓸데없는 병력의 낭비가 생길 텐데, 그런 낭비는 정부의 다른 정치적 원칙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할 텐데, 그런 의지는 이미 내놓은 전쟁목적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생겨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논리적 궤변으로는 결코 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상에서 현실로 넘어오면 모든 것이 다르게 전개된다. 추상에서는 낙관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쪽이 완전성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실현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현실에서도 그렇게 될까?

1. 전쟁이 갑자기 일어나며 과거의 정치세계와 무관한 완전히 고립된 행위라면,

2. 전쟁이 단 한 번의 결전이나 동시에 일어나는 결전(決戰, Entscheidung, decisive act))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3. 전쟁에 그 자체로 완료되는 결전이며 전쟁에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이 정치적 계산을 통해서 전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7. 전쟁은 결코 고립된 행위가 아니다.


위의 첫 번째 조건과 관련해서 보면 전쟁을 하는 양쪽 중에서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추상적인 존재가 나인다. 저항능력을 이루는 요소 중에서 의지는 외적인 사정에 근거를 두지 않는데 이 의지와 관련해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의지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오늘의 의지에서 내일의 의지를 알 수 있다. 전쟁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으며 순간적으로 확대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양쪽은 대부분 상대방의 현재의 상태와 행동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미래의 모습과 행동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절대적 완전성에 이르지 못하며 양쪽 모두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결점이 일종의 온건주의가 되어 나타난다.



8. 전쟁은 단 한 번의 순간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두 번째 조건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살펴볼 계기가 된다.

전쟁에서 결전이 하나뿐이거나 또는 여러 개라도 동시에 일어난다면 모든 전쟁 준비는 당연히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놓친 기회는 결코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적의 전쟁 준비만이 우리의 준비를 위한 척도(Maßstab, criterion)가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시 추상의 영역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결전이 몇 번의 연속적인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면 먼저 일어난 행위의 모든 현상은 자연히 나중에 일어날 행위를 위한 기준(Maßgauge)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현실세계는 추상세계를 대신하고 극단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줄여 줄 것이다.

적과 싸우는 데 쓰기로 정해진 수단을 모두 한꺼번에 투입하거나 투입할 수 있다면 모든 전쟁은 불가피하게 단 한 번의 결전이나 동시에 일어나는 몇 번의 결전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의 결전이 불리하게 진행되면 적과 싸울 수단이 불가피하게 줄어들기 때문이며, 첫 번째 결전에서 모든 수단을 다 써 버렸다면 두 번째 결전은 사실상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전쟁행위는 본질적으로 첫 번째 전쟁의 일부이며 사실상 그것을 계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전쟁의 준비 단계부터 현실세계가 순수 개념을 대신하며 현실적 척도가 극단적 가정을 대신한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양쪽의 상호작용은 극단적 노력이라는 수준 뒤로 물러날 것이며 양쪽은 모든 힘을 한꺼번에 투입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힘이 동시에 효과를 낼 수 없는 것은 바로 힘의 성격과 사용 방법 때문이다. 여기서 힘(Kräfte, resources)이란 본래의 전투력(Streitkräfte, fighting forces), 나라(Land, country)의 면적과 인구 그리고 동맹국을 말한다.

나라의 면적과 인구는 본래의 전투력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나라는 그 자체로 전쟁이 일어나는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부분이란 전쟁터에 속하거나 전쟁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부분만을 말한다.

아마 움직이는 전투력은 모두 동시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전쟁행위가 나라 전체를 포괄할 수 있을 만큼 그 나라가 작은 나라가 아니라면 모든 성(城)이나 강, 산이나 주민 등과 같이 나라 전체는 동시에 투입할 수 없다. 게다가 동맹국의 협력도 전쟁 당사국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관계의 성격 상 동맹국은 종종 한참 지나고 나서야 참전하거나 깨진 균형을 회복하는 데 투입된다.

즉각 효력을 낼 수 없는 이런 저항능력은 대부분의 경우에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저항능력은 대규모의 첫 번째 결전이 일어나 힘의 균형이 심하게 깨진 곳에서도 이 균형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힘을 동시에 그리고 완벽하게 하나로 모으는 것은 전쟁의 본질과 상반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이 사실 자체가 첫 번째 결전을 치르기 위한 커다란 노력을 누그러뜨리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리하게 끝나는 결전은 언제나 손해가 되는 법이며 누구도 자신을 일부러 그런 불리함에 노출시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첫 번째 결전이 곧바로 마지막 전투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첫 번째 결전의 규모가 클수록 그것이 나중의 전투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가 나중에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인간의 정신은 첫 번째 전투에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데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며 다른 때처럼 첫 번째 전투에 모든 힘을 모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양쪽 중에서 어느 한쪽이 힘의 약세 때문에 전투를 중지한다면 이는 상대방의 노력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객관적인 이유가 되며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노력은 다시 적당한 선으로 축소된다.



9. 전쟁의 결과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조건을 보면, 전쟁 전체의 승패가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언제나 절대적인 결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싸움에서 패배한 국가는 패배를 종종 일시적인 불행으로 여길 뿐이며 나중에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 불행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이 그 국가의 강한 긴장과 격렬한 노력을 누그러뜨릴 것은 자명하다.



10. 현실세계의 개연성이 개념의 극단성과 절대성을 대신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전쟁행위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힘의 엄격한 법칙이 사라지게 된다. 극단성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않는다면 극단성 대신에 극단적인 노력의 한계를 밝히는 판단만 남는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현실세계의 현상이 제공하는 자료와 개연성의 법칙에 따를 때만 가능해진다. 서로 싸우는 양쪽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국가이며 정부라면 그리고 전쟁이 더 이상 관념적인 행위가 아니라 독특한 형태로 진행되는 행동이라면, 현실세계의 사실이 앞으로 발견해야 한다고 기대할 수 있는 미지의 것에 관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양쪽은 각자 적의 성격이나 시설, 상태나 조건으로부터 개연성의 법칙에 따라 상대방의 행위를 추론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결정한다.



11. 이제 다시 정치적 목적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위에서(제2절) 빼놓았던 주제를 여기에서 다시 살펴봐야겠다. 그 주제란 전쟁의 정치적 목적이다. 지금까지는 극단성의 법칙, 즉 적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쓰러뜨린다는 의도가 전쟁의 정치적 목적을 거의 삼켜버렸다. 극단성의 법칙이 효력을 잃고 적을 쓰러뜨린다는 의도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되자, 전쟁의 정치적 목적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든 생각이 몇몇 사람과 조건으로부터 나오는 개연성의 계산이라면 전쟁의 본래의 동기인 정치적 목적은 이 계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적에게 요구하는 희생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에게 대항하는 적의 노력도 그만큼 더 적어지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의 노력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의 노력도 그만큼 더 적어질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정치적 목적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가 그 목적에 두는 가치도 그만큼 더 적어질 것이며 그 목적을 그만큼 더 일찍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노력도 그만큼 더 적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의 본래의 동기인 정치적 목적이 전쟁행위로 이루어야 하는 목표는 물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위해서도 척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은 그 자체로는 척도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순수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은 전쟁 중인 두 국가의 관계에서만 척도가 될 수 있다. 똑같은 정치적 목적도 민족에 따라서 그리고 똑같은 민족이라도 시대에 따라서 매우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목적이란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때만 척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래서 대중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다. 대중의 행동을 강화하느냐 또는 약화시키느냐에 따라 거기에서 나오는 결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두 민족과 국가 사이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긴장이 생길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매우 작은 정치적 동기가 그 자체로 전쟁의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효과, 즉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정치적 목적이 두 국가에 불러일으키는 노력에도 적용되며 정치적 목적이 전쟁행위에서 정하는 목표에도 적용된다. 때때로 정치적 목적 자체가 전쟁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정 지역을 정복할 경우가 그렇다. 또한 때때로 정치적 목적 자체가 전쟁행위의 목표를 정하는데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목적과 똑같은 가치를 지니며 평화시에 정치적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관련된 국가들의 특성에 대한 고려는 늘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똑같은 가치를 지닌 다른 것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등가물이 정치적 목적보다 훨씬 더 커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대중의 태도가 싸늘하면 싸늘할수록, 게다가 두 국가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긴장이 약하면 약할수록 정치적 목적은 그만큼 더 중요하며 결정적인 척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목적이 거의 혼자 결정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정치적 목적이 전쟁의 목표와 똑같다면 정치적 목적이 갖는 가치는 일반적으로 목표와 함께 줄어들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목적이 전쟁에서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더욱 더 그렇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섬멸전쟁부터 단순한 무장관측에 이르기까지 온갖 단계의 중요성과 에너지를 갖는 전쟁이 내적 모순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자명해진다. 이는 다른 종류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아래에서 분석하고 설명할 것이다.



12. 휴전은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양쪽의 정치적 요구가 아무리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그리고 내놓은 수단이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또한 양쪽이 전쟁에서 정하는 목표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전쟁행위가 한 순간이라도 멈출 수 있을까? 이는 문제의 본질에 깊이 파고드는 물음이다.

어떤 행동이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데, 이를 행동의 기간이라고 부르겠다. 행동하는 사람이 서두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기간은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

여기서 서두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다.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한다. 느린 사람은 더 많은 시간을 쓰려고 일을 천천히 하는 게 아니다. 그의 성격상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일을 망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간은 그의 내적인 이유에 달린 문제이며 행동을 하는 실제 기간이 된다.

그런데 전쟁의 모든 행동에서 이 기간을 인정하면 얼핏 볼 때 이 기간 이외의 모든 시간 낭비, 즉 전쟁행위에서 일체의 휴전은 모순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양쪽 가운데 어느 한쪽의 진행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진행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3. 행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인데 그건 늘 한쪽에만 있는 것 같다


양쪽이 서로 싸울 준비를 한다면 어떤 적대적 원칙이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시켰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무장을 하고 있는 한, 즉 평화조약을 맺지 않는 한 이 원칙은 남아 있을 것이다. 양쪽은 모두 단 하나의 조건 아래에서만 전투를 중지할 수 있는데, 그건 행동하는 데 더 유리한 때를 기다리려고 하는 경우다. 얼핏 보면 이 조건은 늘 한쪽에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다른 쪽은 저절로 그 반대의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한쪽이 행동하는 데 관심을 보인다면 다른 쪽은 기다리는 데 관심을 가질 게 틀림없다.

힘의 완전한 균형이 휴전을 가져오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적극적인 목적을 갖는 쪽이(공격자) 먼저 공격에 나설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목적과 더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는 쪽이 그와 동시에 더 약한 전투력을 갖고 있는 것을 균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동기와 전투력의 곱하기에서 일종의 방정식이 생긴다면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균형상태에서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면 양쪽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이며,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 변화는 어느 한쪽에만 유리해서 다른 쪽은 행동에 나설 것이 틀림없다. 균형의 개념은 휴전을 설명할 수 없으며 결국 균형이란 좀 더 유리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된다. 두 국가 중에서 한 국가가 적극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면 그 국가가 적의 한 지역을 점령해서 평화시에도 그 점령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경우다. 점령을 하고 나면 그 국가의 정치적 목적은 이루어진 셈이고 행동할 필요는 사라지며 그 국가에 평온이 찾아온다. 적이 이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그 국가는 적과 평화조약을 맺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적이 행동에 나설 것이다. 적이 전투를 잘 준비하는 데 4주 정도 걸린다면 적은 그 행동을 뒤로 미룰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행동에 나서는 논리적 의무는 승리한 쪽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승리한 쪽은 적에게 행동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양쪽이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14. 그래서 전쟁행위에 연속성이 생기며 모든 것은 다시 극단으로 치닫는다.


정말로 전쟁행위에 연속성이 있다면 이 연속성 때문에 모든 것이 다시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끊임없는 활동이 양쪽의 감정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며 양쪽에 더 강한 열정과 원초적 힘을 솟구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행위의 연속성 때문에 더욱 혹독한 결과와 적나라한 인과관계가 생겨나서 모든 행동이 더욱 중요하며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에는 이러한 연속성이 드물거나 전혀 없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에서 행동을 하는 데 쓰는 시간은 극히 적으며 휴전 상태가 나머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것을 언제나 비정상적으로 볼 수는 없으며 전쟁에는 휴전이 가능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 자체가 모순은 아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trotz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