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의 모순세계

  ... 게으름의 탓일지, 아니면 귀차니즘의 탓일지... 반대로 말해 주어진 일들을 하느라 책을 한 보따리 옮겨가면서 포스팅을 쓰려는 의욕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피곤함을 느껴서일지 모를 일이다.

  어제 수업... 출석을 부르고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머리를 짜내 가면서 수업을 하던 중 학생 한 명이 교실 문을 열고 숨차게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알고 보니 윗층 어학원은 더 이상 나가지 않고 국어-사회 수업만 듣기로 했는데 이넘의 사회 수업을 들으려고 다른 학원 수업이 끝나는 대로 택시를 타고 날아오다시피 했다는 것...
  그 이야기를 들으니 미안함이 크다. 사실 어제 출근할 때 토요일 스터디, 일요일 심판배정의 여파로 몸이 많이 피곤해져 있던 까닭에 월요일의 수업시간 틈틈이 있는 공강시간을 효율적으로 교재연구(기출문제 추출 작업을 포함한)에 할애해서 양질의 수업을 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출근하고 회의를 마친 뒤 교재연구를 해야지 할 때 지난 토요일에 보강을 약속한 학생이 아랫층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내려가서 한 시간을 수업을 하다 보니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렸다는.
  더구나 이날의 첫 수업, 이 학년에 유일한 종합반인 녀석들이 신학기 첫날의 여파로 도저히 내용을 따라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늘어져 버려 나 역시 지친 몸을 어찌 추스리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테스트는 있는 대로 보고 채점이다 뭐다를 하니 시간은 훌쩍...

  중구난방으로 떠든 느낌만 잔뜩 드는 월요일의 수업 단상이었다. 엊그제 일요일 아침에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스터디 멤버이시면서 모 학원의 기획실장 일을 하시는 분과의 대화를 통해 현재 다니고 있는 곳에 그다지 희망을 갖지 못한 까닭에 이직 가능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도 있었다.
   아무리 윗선에 대한 불만이며 내 처지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고 해도, 적어도 열과 성을 더해 가진 지식을 제대로 전해주고픈 마음은 굴뚝인데 내 생각만큼 수업이 돌아가지 못하는 인상을 받을 때 느끼는 그 낙차감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반대로 아이들이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정말 무슨 찬송가의 넘~치~네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강의력을 보였을 때(물론 아이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으려고 애써 얼버무리고 다른 쪽의 지식이며 기출문제 등을 운운하지만) 느끼는 낙차감도 만만찮다. 어제는 그런 양쪽의 기분을 모두 느껴야 했던 하루였다.
  언제 떠날지 몰라도, 잡무가 어쩌고 퇴원생이 어쩌고 하면서 남이 남겨놓은 뒤치다꺼리를 해 나가도 골병이 들어가는데, 차라리 그런 고생을 하는 바에는 몇 푼 안 되는 월급 더 받으면서 고생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물론 다른 자리를 그렇게 쉽게 구할 것이라고 장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이기는 하지만.

  택시를 타면서까지 내 수업을 들으러 왔다는 한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미안해져 옴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그 학생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도 싶기에 말이다. 단 두 개 학급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확실히 내 거취가 결정되기까지는, 아니 새로운 곳이 정해져서 그곳으로 갈지라도 뭔가 간절하게 원하는 바를 가진 이의 기대를 최소한 수업에서만큼은 외면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거다.

  하지만 공부를 한 것들을 세상 사는 속에 투영시키지 않는다면 헛수고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항상 존재한다. 정작 강사 일을 하면서 책을 접하고, 그것을 읽으며 세상에 느낀 바를 드러내는 데 소홀한 건 오히려 그 일에 얽매여 날선 비판의 감각을 스스로 무디게 만들고 있는 나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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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밤, 스터디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금요일에 지른 책들이 도착해 있었다. 스터디를 하며 접하게 된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지승호 님이 김수행 교수와 인터뷰를 주고받은 책, 조세희 선생의 걸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장기하와 얼굴들"의 첫 정규 앨범까지... 어쩌면 올해가 내 방의 공간을 질식상태로 만들지 아니면 새로운 공간을 찾아낼지를 고민하는 결정적인 한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의자와 침대를 오가는, 책무더기를 옮기는 작업이 왕복 열 댓 번 이상이 되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게 되니 말이다. 차라리 맘 독하게 먹고 오피스텔 식 원룸을 구해야 할까도 싶고... 아니면 어머님과 누님의 권유대로 방 세 개 짜리 월세집을 구해서 그 방에 이넘의 책들을 쌓아놓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도 싶다. 물론 후자가 되면 강사로서 가지는 시간대의 역전 사항이 전반적인 타격을 적잖이 입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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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tsky의 모순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왜곡과 모순에 가득차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자신감은 없어서 사는 것이라 여기고 있는 이의 이야기...
by trotz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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