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의 모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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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3 15:31

첫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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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부분공개를 둘러싼 토론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어적 (성)폭력의 재발 방지 및 가해자 처벌이라는 한 목표와,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다른 목표를 조화시킬 방안으로는, 님이 제안하신 바와 같이, IP 정보를 일정기간 보관하되 표시하지 않고, 답글 작성 화면에서 'IP 정보가 기록됩니다'와 같은 문구를 보여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제 의견은 이정도로 마치고, 이 글은 토론의 일반적 문제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토론이 활성화된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인터넷 사용의 확대로 과거에 비해 누구나 손쉽게 각종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토론을 통해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대화'와 '타협'이 강조되고, 좀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토론자는 '토론의 자세가 안 되어있다'느니, '다원주의를 모른다'느니 하는 등의 비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토론으로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이 도출되리라는 기대는 환상입니다. 그런 것이 가능했더라면 토론은 진작에 불필요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대부분의 논점에 '합의'가 이루어졌을 테니까요. 그러나 실상은 합의는 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토론은 양측의 논거들을 쌓아가며 더욱 치열하게 계속되어온 것입니다. 성매매, 낙태, 학벌, 성장과 분배, 정통과 이단, 기타 수많은 이슈들에 대한 토론은 길게는 수백년, 짧게는 수년간 계속되어왔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합의를 이룬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토론이란 양측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전제가 존재할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토론하는 두 진영 사이에 최소한의 공유지반조차 없다면, 혹은 두 진영이 논의의 전제로 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면, 양측에 토론이 가능할리가 없습니다.
'올바른 종교'를 놓고 기독교 신자와 이슬람 신자간에 토론이 가능할까요? 국가보안법 폐지를 놓고 '아침이슬' 소속 의원단과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토론으로 합의하는 게 가능할까요? 마르크스가 하이예크를, 노회찬 의원이 김용갑 의원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혹은 그 역은 가능할까요? 상소리 오가며 멱살잡이로 끝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건 어느 한 편이 무식해서도, 말빨이 딸려서도,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서로 최대의 예의와 최고의 논리를 갖추어 토론에 임한다고 해도, 나올 결론은 이것 뿐입니다. '그래, 너는 계속 그렇게 살아라.'
(정치인들이 욕을 먹는 큰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토론 불가능한 상대'와 '토론'해야 하고, '타협 불가능한 사안'을 '타협'해야 합니다. 그 모순이 최악의 형태로 터진 것이 지난 '4자 합의'일지도 모르지요. ^^;)
이렇게 본다면 토론의 목표는 설득과 합의라는 생각은 우리의 지나친 기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대치를 낮추어서, 토론의 목표는 차이의 확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단 토론에 임한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논리를 동원하여 내 입장을 옹호하고, 상대의 허점을 반박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설득과 합의는 여기 따라오는 부수적 결과입니다. 그러나 양측이 모두 자기 변호를 끝낸 후에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냥 그 상태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여기서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고 다원주의를 부정한다, 이런 비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이는 오해입니다. 다원주의란 '당신의 입장을 하나의 가능한 관점으로서 이해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어떤 입장을 이해한다고 그걸 수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불교 철학을 '이해'한다고 해서, '불교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더구나 사람의 의견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존심이 센 동물이라, 자기 의견이 타인에 의해 변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설령 상대의 반박으로 입장을 바꾸게 되어도, '나는 다른 글이나 책을 읽고 입장을 바꾸는 거지 저 자식의 지적때문에 바꾸는 게 아니야' 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입장 변화를 자신의 '주체적 행동'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게 인간입니다(비슷한 심리학 실험도 있었는데..--a). 논리와 이성만으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것은 정말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누군가 생각을 바꾼다면 그것은 이성적 설득이 아니라 정서적 호소,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정치적, 실존적 선택일 가능성이 큽니다(<극단의 형벌>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죠. '나는 변호사일을 하면서 법과 질서를 외치는 보수주의자들도 연방 대배심 조사를 받고 나면 미국시민자유연맹에 회비를 납부하는 회원으로 바뀌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쪽 주장은 이쪽 주장대로 옳은 것이고, 저쪽 주장은 저쪽 주장대로 옳은 것입니다. 양측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논거를 이해하고, 배경을 알았다면, 그리고 자기 입장을 정했다면, 다른 쪽은 그냥 그렇게 놓아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구요? 그러면 마구 욕하며 악플을 달지 말고, 이런 방법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떨지요.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이라는 책에 소개된 방법입니다.
1. 상대방의 논리를 아주 극단까지 밀어부칩니다. 밀어부치되, 설마 이런 일은 안 일어나겠지, 설마 이런 걸 주장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정도로까지 밀고나갑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말한 것에 바탕을 두어야지, 자기 맘대로 지어내면 안되겠죠. 이것은 아무것도 논증하지 않지만, 상대측 주장의 논리적 귀결이 어디인가를 보여줍니다.
2. 상대방의 논리를 다른 사례에 적용시킵니다. 논리 구조는 놓아두고, 주요 개념들만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할만한 대상으로 바꿔야겠죠. 이것 역시 아무것도 논증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측 주장이 어떤 논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를, 첨예하게 감정이입 되어있는 대상에서 한발짝 떼어내어, 보다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달까요.
3. 아니면 패러디를 통해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법이 있겠죠.
뭐 특별한 방법은 아니죠? 이미 많은 분들이 쓰고 계신 방법이기도 하고..주의할 점은, 위의 방법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논증하지 않는다는 점.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점.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이 아니라 두 진영 사이에 있는 중간그룹을 향한 방법이라는 점. 정말 거슬리는 주장이 아니라면, 역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가장 유익할 듯 싶네요.
끝으로, 토론 경력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토론의 기술적 방법에 대해 용감하게--; 몇 가지 적어보겠습니다.
자주 사용되는 게 상대의 글을 붙여넣기 하고 사이 사이마다 조목조목 자기 반론을 끼워넣는 방법입니다. 이것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겠습니다만, 한 편의 글은 대개 자신의 완결된 논리구조를 갖추고 있으므로, 나의 논리를 상대방의 논리 구조에 맞추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도 힘들지요. 경우에 따라 적절할 때가 있겠습니다만, 자신의 논리구조에 맞춰 새로 글을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달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내가 무엇에 대한 반론을 펴는 것인지 상대에게 명확히 알려야겠죠. 주장을 펴기에 앞서 좀 투박해보여도 '나는 당신의 주장을 ~~~라고 이해했다'라고 밝히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오해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토론을 피할 수 있겠죠.
예시를 드는 것도, 적절한 사례는 자칫 허공에 뜰 수 있는 토론을 생생하게 만들어주겠습니다만, 잘못하면 토론이 근본 원리에 대한 논의보다는 '더 많은 사례 끌어오기 경쟁', 혹은 예시에서 트집잡기 놀이, 지엽적인 논쟁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 외에..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포스트'라면 반말을 써도 상관이 없겠지만, 상대에게 직접 하는 말인 '리플'이라면 경어를 쓰는 것이 훨씬 적절하고 효과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음..짧게 끝날 글인 줄 알았는데 주절주절 늘어놓다보니 엄청 길어졌군요. 죄송하게 생각하며..한 해의 마지막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모두들 즐겁고 흥겹게(^^;) 마무리하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 행복한 일들 누리는 한편, 토론은 가열차게 했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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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글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은 토론이다. 사람의 의견은 모두 같을 수가 없으며, 언제나 새로운 사상이 출현한다. 그리고 서로간의 토론을 통해 이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다수가 동의할만한 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우리는 학교에서 배워왔다.

하지만 실제로 이뤄지는 토론에서 참가자들이 타협을 이루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서로의 신념만을 주장하며 말빨을 세우다가 결국은 서로 '대화와 타협을 모르는 꼴통'이라고 비난하며 떠나가기 일쑤이다.

정말 그럴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토론의 자세를 갖추지 못해 서로 합의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 공통의 전제 - 합의의 조건

토론의 무기는 논리다. 각자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근거들을 논리적으로 풀어놓는다.

문제는 모든 것을 논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논증이라도 그것은 일정한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논증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게 되는 최초의 전제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선언될 뿐이다.

이를테면 '이성애자 부부로 구성되는 가족과 부계 혈통은 천륜이다'라는 명제는 증명할 수 없다. 그것은 신념일 뿐이다. 이에 대해 주장되는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원간의 관계이지 가족의 형태가 아니다'라는 명제 역시 증명은 불가능하다. 이것 역시 하나의 신념일 뿐이다. 이 두 전제를 도대체 어떻게 '합의'하고 '타협'한단 말인가? 그때 그때 달라요? 어떤 형태의 타협안이 가능하다 해도, 그 타협안은 양측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가 돼버릴 것이다.

양측의 주장이 공유하는 전제가 많을수록 합의는 쉽다. 공통되는 전제가 전혀 없다면 타협은 불가능하다. 호주제 폐지론자와 존치론자가 타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양측의 신념 체계와 세계관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느 한쪽이 꼴통인 것이 아니다. 합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2. 합의가 아니라 개종이다

실제 역사속의 많은 토론을 보아도 그것이 양측의 '합의'로 끝난 적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오히려 새로운 사상이 낡은 사상을 '대체'하는 과정이었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에 '설득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개종한' 것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고귀한 신분과 천한 신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경계는 넘나들 수 없다는 것은 중세의 상식이었다. 이에 대해 계몽사상가들은 신분이란 허구이며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이것을 '논증'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이것을 절대 '증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만 '자명(self-evident)'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그럼에도 계몽사상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혁명에 성공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더 적합한 사상으로 인정하고 수용했기 때문이다.

실상 토론을 통한 합의가 가능하다면 우리 주변의 수많은 문제들은 진작에 정리됐어야 옳다. 그러나 어디 그런 사례가 있던가? 포르노, 낙태, 성장과 분배, 기타 등등..심하게는 1백년 이상 끌어오고 있는 토론도 허다한 것이다. 어떤 문제가 정리되었다면 그것은 양측 모두 만족할 합의를 이룬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한 쪽이 낡은, 부적합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서로 전제가 다를수록 사람들은 치열하게 토론한다. 그러나 전제가 다르기에 합의는 불가능하고, 개종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자신의 전제, 신념체계, 가치관,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자에게 어떤 실존적 변화가 일어나거나,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하지 않는 한 일어나기 어렵다.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불교로, 혹은 철저한 무신론자가 개신교 신자로 개종할 가능성을 상상해보자. 결국 양측은 포기하고 서로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게 된다. 그것이 '관용'이다.

3. 진리, 판단의 기준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떤 것이 '올바른' 입장인가를 결정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토론에서 승리하는 쪽이 올바른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같은 토론을 보고 나서도 어느 편이 승리했는지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경과 같은 절대적인 신의 말씀이 없는한 모두가 동의할 판단의 기준은 없다. 심지어는 성경의 해석조차 사람마다 다름에야!

그러면 '올바른' 입장이란 없는 것인가? 모두가 다 옳은 것인가? 하지만 이렇게 허무주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판단의 기준은 그 주장의 유용성을 통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주장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기반한 가치관, 세계관이 우리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풍요롭게 만들어주느냐에 따라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경쟁은 '누가 옳으냐'의 문제에서 벗어난다. 이제 문제는 '누가 더 풍요로운 삶을 사느냐'가 되는 것이다.

4. '이교도'를 어떻게 대할까

그렇다면 토론이란 무의미한 것인가? 그냥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아야 할까? 합의가 어려움에도 토론이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 과정에서 자신의 오류와 맹점을 파악할 수 있고, 자기 세계관을 보다 더 정밀하게 가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 확실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상대방에게 신선한 지적, 정신적 충격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면 자신의 생각이 더 널리 수용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이교도'들에게, 어떻게 하면 내 의견을 전달할 수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그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도 방법은 '인격전도'라고 한다. 자신의 삶으로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토론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세계관으로 구성되는 삶과 세계가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상대방의 주장은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다. 나의 세계만큼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상은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 '얼어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만큼 매우 어렵다. 다음 방안은 상대방의 전제를 통해 논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이건 상대방이 세운 규칙 아래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큰 한계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는 반박을 포기하고, 그저 자신의 생각을 공손하고 논리정연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일단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나면, 동의는 못하더라도 '관용'하기는 더 쉬울 것이다. 나아가 약간의 작은 배려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내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냥 '관용'하는 게 예의바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피해를 준다면? 내 생각으로는 이런 것들이 가능할듯 싶다.

ㄱ. 웃음거리로 만든다. 웃음은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된 사상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나 다수가 거부감없이 즐길만한 방법을 택해야 하므로 상당한 재치와 내공이 필요하다. 우리편이 어느정도 되어야 가능하다는 한계도 있다.

ㄴ. 머리수로 밀어부친다. 입장이 같은 사람들이 다같이 달려들어서 비판을 퍼부어서, 다시 그런 말을 할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시스트로 몰릴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위험성이 명백한 사상에 관해서는 이런 방안도 가능할 것 같다. '위험성'을 어떻게 판단하냐고 묻겠지만, 별로 위험하지 않은 사상이라면 달려들 사람도 없을 것이고, 오히려 변호인이 생길 수도 있다.

어쨌거나 둘 다 그렇게 개운한 방법은 아닌 게 사실이다. 결국 서로 최선을 다해 각자의 입장을 소개하고 서로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난 뒤라면, 그 후에도 입장의 변화가 없다면, 그 다음은 그냥 그대로 살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서로 '타협을 모르는 꼴통'이라고 비난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대로, 상대는 상대대로, 그렇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지내는 것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의, 유일한 방안인 것 같다.

출처 | 잡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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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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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31 15:19

[펌글] 지름신의 명언

스크랩 보관글들... 2006.08.31 15:14 by Trotzky trotzky
* 지름신이 보고계셔. (마리미테)

* 부모님께 나의 지름을 알리지 마라. (이순신)

* 짐이 곧 지름신. (루이 14세)

* 돈다발이 세 뭉치라도 질러야 보배.

* 사재기도 지름이다. (소크라테스)

* 돈이 다 떨어져도 지를 구멍은 있다.

* 파산하지 않은 자 지름을 논하지 말라.

* 안이한 지름에 파산하랴.

* 지름은 모든 곳에 있다. (로댕)

* 지름은 길고 인생은 짧다.

* 지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다만 파산할 뿐이다. (맥아더)

*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나는 오늘 한 물건을 지를 것이다.

* 한쪽 통장이 비거든 다른 통장도 지르거라. (예수)

* 지름할 때는 널리 알리도록 하고 메꿀 때는 남이 모르게 하라.

* 물품을 보고 지르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 하늘은 지르는 자를 돕는다.

* 지름에는 왕도가 없다.

* 모로가도 지르기만 하면 된다.

* 질렀다! 질렀어! (아르키메데스)

* 널리 사람을 지르게 하라.

* 지름은 저축보다 강하다.

* 질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 이것도 같이 지르도록 하여라.(지름신)

* 세살 지름 여든까지 간다.

* 지름천국 저축지옥

* 나는 지른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 난 내 자금의 3%밖에 활용하지 못했다.(아인슈타인)

* No Girum, No gain.

* 지름하는 자는 파산하는 자에 미치지 못하며,
파산하는 자는 돌려막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 저축하는 자 위에 소비자 있고, 소비자 위에 지름신 있다.

* 넌 이미 지르고 있다.

* 꼭 지르고 말겠어! 지름신의 명예를 걸고! (김전일)

* 질러라 그러면 얻을지어다.

* 미래의 행복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늘 허락된 지름을 한껏 누리는 것이다.

* 왔노라, 보았노라, 질렀노라.

* 오늘 지름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 인생은 지름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며,
지르는 사람에게는 희극이다.

* 아침의 지름으로 하루를 열고 저녁의 지름으로 하루를 끝내야 한다.

* 지㎏말煐?

* 인생의 최고의 불행은 인간이면서 지름을 모르는 것이다.

* 지르다 말면 아낌만 못하다.

* 길 가는 사람 셋 중에는 반드시 지름신이 있다. (공자)

* 피할 수 없으면 질러라!

* 만국의 노동자여, 질러라! (마르크스)

* 만인에 대한 만인의 지름 상태. (홉스)

* 지름을 이루기 위해 견딘 시련들이야말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승리이다.

* 내 마음은 이미 지름이요, 그대 돈 가져오오.

* 어떤 사람은 파산에 도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를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 첫 지름에 파산하랴.

그리고(......)
































* 질러라!! (지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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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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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9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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