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 http://www.mediamob.co.kr/msmarple/Blog.aspx?ID=207028

  미디어몹에 들어갔다가 오래간만에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글을 발견. 이번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에 관련한 협상문의 영어본을 제대로(?) 번역하신 분의 글이다. 100분 토론을 끝까지 볼 생각이 없었기에(화가 나서 안 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뒷북을 치는 것이 줄겁지는 않지만 내가 가르쳐야 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받고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은 제시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때아닌 정의감에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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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tire carcass of cattle not inspected and passed for human consumption is also prohibited, unless the cattle are less than 30 months of age, or the brains and spinal have been removed. The risk of BSE in cattle less than 30 months of age is considered to be exceedingly low ...


이상길 단장은 처음 not inspected의 의미가 송기호 변호사가 지적한 바와는 달리 합격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검사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주장하여 일차적으로 해석의 교란이 일어났다.  

지금 보면 이단장이 설명한 대로 식용을 위해 허가 받는 절차에 오기 전에 목장에서 사료가공업체로 검사되지 않은 채 팔려간 소가  이 단어로 인해 지시될 수 있다 해도 not inspected and passed for human consumption 을 연계하여 문장 전체를 볼 경우에는  

"인간의 식용가능 여부를 가르는 절차를 거쳐서 합격되지 않은 (not inspected and not passed for) 축우의 시체를 통째로 가축사료로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제 중요한 단서가 붙지만). 즉, 이단장의 말이 지시한 바대로 검사단계 이전에 팔려 나간 것은 물론이고 이후 검사탈락 소도 포함하고 기타 등등, 여하간

식용기준검사에 합격되지 않은 축우를 통째로 사료화하는 것은 금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부분은 자구상 논란의 여지가 없고, "식용기준"이라는 보편적인 기준을 먼저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말과는 반대로 중요한 강조점을 뒤에 쓰는 영어식 흐름에 따라서, 사실상의 핵심은

1.축우의 연령이 30개월 미만이 아니라면  
2.뇌와 척수가 제거 되지 않았다면

 (unless가 A, or B의 형태로 두 문장을 A 이거나 B 하나를 충족하면 되는 조건절로 만든다.)
 
이 단서에 있다. 즉, 1이나 2를 뒤집어서 충족하면, 그러니까 축우의 연령이 30개월 미만이거나, 2. 뇌와 척수가 제거 된 축우는, 앞에서 밝힌 "식용기준" 합격이 아니더라도 금지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종합해서 해석해 보면,
1. 30개월 이하의 소는 식용기준 도축허가를 받지 않았더라도 통째로 사료용으로 쓰일 수 있다.
2. 뇌와 척수가 제거된 소는 30개월이 넘고 5세, 6세에도 식용기준 도축허가를 받지 않고 사료용으로 쓰일 수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은 왜 30개월 이하의 소는 뇌와 척수 제거 여부나 다른 식용기준검사 및 합격판정을 안 받아도 되는가에 대한 근거를 댄 것으로 보인다. 즉, 30개월 이하는 위험 가능성이 극히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뇌와 척수가 제거된 경우에는 월령을 따지지 않고 식용기준 합격 절차를 밟지 않거나 불합격 되어도 사료로 쓰일 수 있다의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싼 소를 두고 그럴리야 없겠지만... 식용기준 합격 소는?
당연, 월령에 상관 없이 사료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이 "강화된 사료조치"라는 것의 실체는 "식용기준"을 잣대로 삼아 그에 미달하는 것 중 사료로 쓰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규정으로, 결코 동물사료를 "완전금지"하는 방향으로 단계적 조치를 취해 온 우리나라와 유럽의 사료정책의 정신과는 일말의 교감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100분토론> 논란과 연결해 보자면, 송변호사가 지적한 대로, 다음과 같은 정부측의 발표는 명백한 오역인 것이다.    


모든 광우병 감염 소, 30개월 이상 된 소에서 광우병 위험 물질이 있을 수 있는 뇌나 척수를 제거하도록 하였고, 30개월 미만 소라 하더라도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한 소의 경우 돼지 사료용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어 사료로 인한 광우병 추가 감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임(2면).



  "unless...or"가 과연 이 "오역"을 나은 주범인가?
그렇다면 그 영어로 도대체 협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묻고 싶고,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이 의도적 오역을 주도했는지 묻고 싶어진다.
(설마 번역담당자를 자르는 것으로 무마하려 들지는 않겠지?)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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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otzky
  알라딘에서 음반 체크해 놓고 새벽 시간동안 음악을 듣다가 문득 알라딘을 통해 제일 저명한 북 리뷰어 블로거라고 할 수 있는 "로쟈" 님의 블로그를 들어가 보았다. 인문학 계통에 종사하고 계신 그분은 요즘의 전개상황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여타의 인터넷 언론이나 몇몇 아는 블로거 분들의 블로그만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는 측면도 있었고.

  아래의 부분은 그분의 블로그에서 미국 쇠고기의 수입 협상과 관련해 프레시안에서 칼럼을 옮겨온 것을 불펌해 온 것이다. 프레시안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뭔가 한 번 더 재확인하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이 글들을 파일화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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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읽어보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04095610). 이번 '광우병' 사단을 불러일으킨 한미간의 합의문 내역에 대한 법학자의 해석인데, 그에 따르면 이번 협상 결과를 정부는 은폐했다. 그리고 그 핵심이란 건 '굴욕'이다. 이 해석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정확한 해명이 듣고 싶다.

프레시안(08. 05. 04) [송기호 칼럼] 국민이 몰랐던 네 가지 진실 

나폴레옹의 진짜 업적은 전쟁 승리보다는,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법전은 최초의 근대적 민법으로, 사유 재산제와 계약 자유를 담았다. 그리고 그의 법은 나폴레옹 자신의 말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민법을 만들 때, 조문의 해석에 다툼의 소지가 전혀 없는 완벽한 법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완성된 법전에 만족하면서, 이 정도면 장차 어떤 프랑스인이 읽더라도 그 의미가 명확할 것이라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에, 파리에서는 그의 법률 조항의 의미를 놓고 해석론의 대립이 발생했다고 한다.
 
아무리 훌륭한 법이라도 그 해석에서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서로 언어와 가치가 다른 나라 대 나라 사이의 합의문을 놓고 그 해석에 다툼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아예 1969년에, 유엔 회원국은 비엔나에 모여,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 안에 국가 간의 합의문을 어떻게 해석할 지 그 원칙을 정해두기까지 했다. 여기서 합의된 일반 원칙은, "합의문의 문맥에 부여되는 통상적인 의미(ordinary meaning to be given to the terms of the treaty)"에 따라 해석한다는 것이다.
 
나라 간 합의문의 해석의 출발은 그 문항의 문언이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가라도 조문 없이 해석을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정운천 농림부 장관은 지난 4월 18일 미국과의 쇠고기 광우병 검역 협상을 타결하면서도 합의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보도 자료만을 냈다. 법률가가 합의문 문항을 보지 못하고, 보도 자료를 보고 그 의미를 새겨야 한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다. 법률가에게 필요한 것은 조문이지 보도 자료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즉시, 미국과의 합의 내용을 정확히 해석하고자, 농림부 장관에게 합의문 영문본과 한글본 공개를 청구했다.


 
은폐 1 : 국제수역사무국 결정 없이 검역 주권 행사 못한다
나는 농림부 장관의 공개를 기다리면서, 보도 자료라도 읽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보도 자료였다.  

미국 내에서 추가로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할 경우 미국 측은 즉시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한국 정부에 통보하고 상호 협의키로 하였으며, 동 역학조사 결과가 미국의 광우병 위험에 대한 국제수역사무국의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에 반하는 상황일 경우 수입을 전면 중단키로 하였음.


가슴이 꽉 막혔다. 알다시피,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창설 회원국이다. 그리고 세계무역기구 위생검역협정(SPS 협정)이 보장하는 검역 주권을 누리고 있다. 특히 국제 검역법은 조류독감, 광우병 등과 같이 확실한 과학적 설명을 하기 어려운 전염병에 대하여, 관련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라도 회원국이 잠정적으로 검역 조치를 취할 국제법적 권한을 주고 있다. 해당 조문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관련 과학적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 회원국은 이용가능한 적절한 정보를 토대로 잠정적으로 위생 검역 조치를 취할 수 있다. (In cases where relevant scientific evidence is insufficient, a Member may provisionally adopt sanitary or phytosanitary measures on the basis of available pertinent information…) : 위생검역협정 5조 7항


만일 미국에서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할 경우, 이는 일단 미국의 광우병 통제 정책의 실패를 의미한다. 미국에서 왜 광우병이 추가 발생했고, 그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과학적으로 정확히 판명하여 거기에 맞는 수준의 검역 조치를 취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바로 위 조문은 이와 같이 관련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할 경우라도, 그 시점에서 여러 이용 가능한 자료를 토대로 잠정적으로 검역 조치를 취할 권한을 한국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에서의 광우병 추가 발생을 급히 살펴보고, 필요한 경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잠정 중단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해 놓고 나서, 광우병 추가 발생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한 후, 심각하지 않은 사건으로 밝혀질 경우에는 다시 수입을 하면 된다. 이는 국제법이 보장한 한국의 검역 주권이다. 그리고 이는 농림부 장관의 고시인 '지정 검역물의 수입 금지 지역'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이 고시는 악성 가축 전염병인 광우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에도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제5조(수입 금지 등) 농림부장관은 제3조 제1항의 수입 금지 지역으로 지정되지 아니한 지역에서 악성 가축 전염병이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에는 법 제32조의 규정에 의하여 당해 지정 검역물의 수입을 금지하거나 법 제52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검역 중단·출고 중지 등 당해 병원체의 국내 유입 방지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위 농림부 보도 자료는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누리고 있는 잠정 조치 권한과 농림부 고시 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에서 오늘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미국의 역학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미국산 쇠고기를 계속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미국의 역학조사 결과가 나온 다음이다. 그 결과가 "미국의 광우병 위험에 대한 국제수역사무국의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에 반하는 상황일 경우"가 아니면, 미국산 쇠고기를 계속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위와 같은 "상황"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농림부 장관의 합의문 영문본 공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농림부 장관은 지난 4월 22일, 미국과의 합의 내용을 입법 예고를 했다. 이제 위 보도 자료는 이렇게 5항으로 조문화되어 있었다.
  

5. 미국에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하는 경우, 미국 정부는 즉시 철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여야 하고 조사 결과를 한국 정부에 알려야 한다. 미국 정부는 조사 내용에 대해 한국 정부와 협의한다. 추가 발생 사례로 인해 국제수역사무국의 미국 광우병 지위 분류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경우 한국 정부는 쇠고기와 쇠고기 제품의 수입을 중단할 것이다.


법률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는 앞의 보도 자료와 다르다. 앞에서는 마치 미국의 역학조사 결과를 통보받은 한국이 마치 어떤 독자적 상황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위 입법 예고안에서는 미국의 조사 결과는 조사 결과일 뿐이다. 닫혀 있다. 그리고 한국의 자주적 권한은 점점 사라진다. 아예 문장의 주어가 "추가 발생 사례"라고 하는 과거의 사건, 곧 한국이 개입할 수 없는 사건이 된다. 그리고 국제 기구의 지위 분류라는 사건에 한국이 개입할 여지도 없다.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써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위 조항을 다시 읽었다. 한국의 실낱같은 희망처럼 보이는 단어로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경우"를 새겼다. "영향"이란 말의 통상적인 의미는 "어떤 사물의 효과나 작용이 다른 것에 미치는 일"이다. 미국에서 광우병 추가 발생은 본질상 미국의 광우병 등급 지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부정적 영향 여부를 결정할 것인가? 결국 내겐 합의문 영문본이 필요했다.
 
그런데 농림부 장관은 지난 28일에, 내게 통지를 했다. 아직 자구 수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문본 공개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난 22일에 그 한글본을 입법 예고를 할 수 있었을까? 결국 영문본을 보기 위해 농림부 장관을 제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상법을 한다는 법률가가 통상법 조문을 보려면 장관을 제소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온 합의문 영문본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영문본을 보고 해석하지만, 나는 소송에서 장관으로부터 당당히 영문본을 건네받을 것이다. 앞으로 통상법과 식품법을 하려는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할 것이다. 마침내 영문 합의문의 문항을 보면서 해석의 궁금증은 모두 풀렸지만, 결론은 비참했다. 이렇게 되어 있었다.
  

5. In the event (an) additional case(s) of BSE occur(s) in the Untietd States, the US government shall immediately conduct a thorough epidemiological investigation and inform the Korean government of the results of the investigation. The U.S. government will consult with the Korean government about the findings of the investigation. The Korean government will suspend the importation of beef and beef products if the additional case(s) results in the OIE recognizing an adverse change in the classification of the U.S. BSE status. (미국에서 광우병 추가 사례(들)이 발생하는 경우, 미국 정부는 즉시 철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여야 하고 조사 결과를 한국 정부에 알려야 한다. 미국 정부는 조사 사항에 대해 한국 정부와 협의한다. 미국 광우병 추가 발생 사례(들)이 국제수역사무국의 미국 광우병 지위 분류 '하향 변경(adverse change)' '공인(recognizing)'으로 귀결되는 경우 한국 정부는 쇠고기와 쇠고기 제품의 수입을 중단할 것이다.)


명확했다. 마치 나폴레옹이 만들려고 했던 민법처럼, 위 조항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은 미국에서 광우병이 아무리 많이 발생하더라도 자주적으로 검역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농림부 장관이 그토록 사랑하는 국제수역사무국에 달려 있다.
 
영문본과 한글본을 대조하면서, 나는 농림부 장관의 능력을 재발견했다. 그는 영문 합의문에는 있는 "case(s)"의 복수 명사를 한글 보도 자료와 입법 예고안에서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합의문의 "adverse change"를 한글에서는 "반하는 상황" 혹은 "부정적인 영향"으로 옮겼다. 아마도 농림부의 영어 사전에서는 "change"란 "상황" 혹은 "영향"이라고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매우 유감스러운 것은 농림부 장관의 유능한 대가로, 한국은 WTO 회원국으로서 가지고 있는 잠정 조치 권한, 그러니까 국제법에 의하여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법적 권한을 포기했다. 이것은 헌법 위반 행위이다. 그 어떠한 장관도 국회의 동의 없이 주권의 제약을 가져오는 합의를 외국과 할 수는 없다.



 
은폐 2 : 미국 쇠고기의 월령 표시는 어떻게 되는가?
농림부 장관의 능력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그의 능력은 빠짐없이 발휘되었다. 쇠고기 월령 구분제를 보자. 30개월령이 넘은 쇠고기를 포장 상자에 표시하도록 하는 문제(Marking requirements for OTM meat)는 한국으로서는 검역의 실효성을 좌우하는 본질적 문제이다. 눈앞의 쇠고기나 등뼈만을 달랑 보고 그 나이를 판별할 수 있는 검역 공무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검역 기준에는 미국 정부의 검역 공무원은 쇠고기 수출 검역 증명서에 반드시 소의 월령이 30개월 미만임을 확인한다는 서명을 해야 했다(19조 1항). 그런데 농림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의 그 보도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협상에서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된 수출 검역 증명서상의 도축 소 월령 표시 여부와 관련해서는 개정된 수입 위생 조건 발효 후 180일간 등뼈가 정상적으로 포함되어 가공되는 티-본 스테이크 수출품 등에 한해 해당 쇠고기가 30개월령 이하임을 표기하고 180일 이후 계속 표시 여부에 대해 추가 협의키로 하였음….


이 보도 자료가 우리에게 정말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미국 검역 공무원이 발행하는 수출 검역 증명서에, 도축소의 월령 표시를 하지 않기로 한국이 합의해 주었다는 것이다. 미국 공무원이 수출 검역 증명서에 기재해야 할 사항에서 소 월령 표시는 삭제되었다(합의문 22조 1항). 이로써 미국 정부는 개개의 쇠고기 제품에 대한 월령 보장 책임에서 벗어났다. 미국 도축장의 입장에서는 한국으로 선적되는 제품에 대해 미국 정부로부터 쇠고기 월령 확인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사라졌다.
 
나의 해석이 맞는다면, 앞으로 한국의 검역 공무원은 초능력자가 돼야 한다. 노무현 정부 때 그는 쇠고기 상자에서 뼈와 살을 구별하면 되었다. 소의 나이는 미국 공무원이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미국 도축업자를 직접 상대해야 한다. 눈앞의 등뼈가 실은 30개월령이 넘는 소의 광우병 위험 부위인데도 미국 도축업자가 그만 나이를 잘못 감별하는 바람에 한국으로 불법 수출된 것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보고? 나의 해석대로라면 단지 그 등뼈만을 보고.
 
그래서 미국 도축장을 직접 철저 현지 점검하시겠다고? 불가능하다. 첫째, 노무현 정부의 기준에서는 한국이 개별 승인해 준 도축장만이 한국으로 쇠고기를 수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농무부의 검사를 받는 모든 도축장이 자격이 있다. 둘째, 노무현 정부 시절의 기준에서는 한국 검역관은 모든 미국 도축장에 대해 현지 점검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중대한 위반을 적발해서 해당 작업장에서 한국으로의 수출 작업이 중단되도록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대표성 있는 표본에 대해서만 현지 점검을 할 수 있다. 한국이 도축장에서 중대한 위반을 적발하더라도 그 결과를 미국정부에 통보할 수 있을 뿐이다(8항). 이 표본에 포함되지 않으면, 미국의 도축장은 한 차례 정도의 심각한 위반을 저질러도 한국의 현지 점검 대상에 들어가지도 않는다(24항).


 
은폐 3 :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 전수 검사를 할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전수 검역 검사를 할 권한을 정면으로 포기했다(는 점이다). 물론 연간 약 2억3000만㎏ 의 미국산 쇠고기 선적 물량을 전수 검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특별 점검 대상이 되는 도축장의 제품이라든지, 혹은 특정 상황에서는 전수 검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합의문 영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23. If an SRM is found, FSIS will conduct an investigation to determine the cause of the problem. Product produced by the pertinent meat establishment shall continue to be eligible for import quarantine inspection. However, the Korean government will increase the rate of inspection of subsequent beef and beef products from the meat establishment. After the Korean government inspects five lots of equal or greater quantity of the same product without finding a food-safety hazard, the Korean government shall apply its standard inspection procedures and rates.(광우병 특정 위험 부위가 발견될 경우, 미국 식품안전검사국은 그 원인을 판정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 해당 도축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한국의 수입 검역 검사를 받을 자격을 계속 가져야 한다. 단, 한국 정부는 해당 도축장의 향후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에 대한 검사 비율을 높일 것이다.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수량인 동일 제품 5개 수입분에 대해 한국 정부가 검사를 한 후, 식품 안전 위해 요인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한국 정부는 표준 검사 절차와 비율을 적용해야 한다.)


이 조항이 존재하는 한,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검사에서는 표준 검사 비율을 적용해야 한다. 즉 전수 검사는 안 된다. 이렇게 새기지 않는다면, 이 조항은 존재 의의를 잃는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다시피 광우병 위험 특정 부위가 발견된 경우라 해도, 한국은 그저 검사 비율을 높일 수 있을 뿐이고, 그것도 5회 검사 합격이면 그 비율을 다시 내려야만 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런 조항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전수 검사를 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국제법의 조약 해석 원칙에 어긋난다. 조약을 해석하는 데에서, 어느 조약 문구를 무의미하게 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는다(effective interpretation principle).
 
농림부 장관의 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합의문 시행 후 180일이 지나면, 한국의 소비자는 눈앞의 갈비 스테이크(티본 스테이크)만 보고, 그 월령을 구별할 능력을 지녀야 한다. 앞에서 보았던 보도 자료는 마치 180일 이후 계속 표시 여부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180일이 지나면 갈비 스테이크 월령 표시 제도는 폐지된다. 대신 한국과 미국의 협의가 시작될 뿐이다. 이 협의에서 미국은 자신에게 불리할 경우, 결코 갈비 스테이크 월령 표시 제도 부활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합의문 부칙 3항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The Korean government and the U.S. government agree to have consultations upon the completion of the 180 day period with a view to addressing concerns after reviewing the notation's effect on beef trade and its inspection.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180일 기간이 다하면, 쇠고기 교역과 검사에 미치는 표시의 영향을 검토한 다음, 관심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협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 부칙 3항


은폐 4 : 미국에서는 '주저앉는 소' 등의 뇌, 척수를 동물 사료로 사용한다
 
글이 길어지지만, 마지막으로 농림부의 노력이 얼마나 핵심적 주제를 대상으로 일관되게 진행되는 지를 확인하자. 농림부는 지난 2일, 그러니까 기자들과의 이른바 끝장 토론에서 미국의 이른바 강화된 사료 조치를 놓고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관련 문답 자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광우병 감염 소, 30개월 이상 된 소에서 광우병 위험 물질이 있을 수 있는 뇌나 척수를 제거하도록 하였고, 30개월 미만 소라 하더라도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한 소의 경우 돼지 사료용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어 사료로 인한 광우병 추가 감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임(2면).


그러나 나는 미국의 사료 조치에 대해 달리 해석한다. 미국의 사료 조치는 '주저앉는 소'와 같이, 사람의 식용을 위한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해 식용 부적합 처리된 소라도 30개월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 뇌와 척수마저도 동물 사료로 급여하도록 하는, 그런 것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73FR22720).
  

The FDA is amending the agency's regulations to prohibit the use of certain cattle origin materials in the food or feed of all animals. These materials include the following: The entire carcass of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y(BSE)-positive cattle; the brains and spinal cords from cattle 30 months of age and older; the entire carcass of cattle not inspected and passed for human consumption that are 30 months of age or older from which brains and spinal cords were not removed; tallow that is derived from BSE-positive cattle; tallow that is derived from other materials prohibited by this rule that contains more than 0.15 percent insoluble impurities; and mechanically separated beef that is derived from the materials prohibited by this rule. These measures will further strengthen existing safeguards against BSE. (미국 식약청은 소에서 나온 특정의 물질을 모든 동물 사료로 급여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규정을 개정한다. 이 사료 급여 금지 물질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광우병 감염 소의 전체 부위, 30개월령이 넘은 소의 뇌와 척수, 30개월령이 넘는 소로서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해 식용 부적합 처리된 소에서 뇌와 척수를 제거하지 않은 경우 그 소의 전체 부위, 광우병 감염 소에서 나온 우지, 이 규정에서 금지 물질로 정한 것에서 나온 우지로서 불용성 불순물 함유가 0.15% 이상인 것, 그리고 이 규정에서 금지 물질로 정한 것에서 나온 기계적 분리육. 이러한 조치는 현행 광우병 안전 조치를 더 강화시켜 줄 것이다.)


이를 두고, 농림부는 "30개월 미만 소라 하더라도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한 소의 경우 돼지 사료용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미 식약청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73FR22733).
  

Further, the regulations were revised to exclude from the definition of CMPAF certain cattle that have not been inspected and passed for human consumption. Under the proposed rule, cattle that were not inspected and passed for human consumption were excluded from the definition of CMPAF if their brains and spinal cords were removed. The final rule was revised to indicate such cattle are not considered CMPAF if the animals were shown to be less than 30 months of age, regardless of whether the brain and spinal cord have been removed. (또 당해 규정은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해 식용 부적합 처리된 특정 소를 사료 급여 금지 물질의 정의에서 제외하도록 개정되었다. 종래의 입법 예고에서는 도축 검사에 합격하지 못해 식용 부적합 처리된 소는 그 뇌와 척수가 제거되어야 사료 급여 금지 물질의 정의에서 제외했었다. 본 최종 규정에서는 그런 소라도 뇌와 척수의 제거를 불문하고 30개월령 미만인 경우에는 사료 금지 물질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를 개정한다.)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조항에 항상 유일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은 실패한다. 나의 해석이 틀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학자적 소신으로 문언적으로 살펴보았을 땐, 이건 굴욕의 합의문이다. 그리고 핵심적인 굴욕은 은폐되었다.(송기호/변호사·조선대법대 겸임교수)

08. 05. 04.

P.S. 프레시안의 후속기사로는 진중권의 '대중은 무엇에 분노하는가?'(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805051243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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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otzky
  마음에 드는 좋은 글이 있을 때, 인터넷의 속도와 날짜 속에 밀려 기억 저편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불편함을 피하고자 펌질을 하는 것 자체는 딱히 탓하기 어렵지 않나 생각을 한다. 다만 원글을 쓴 이의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다소나마 나아질 테지만...
  하지만 결국 불펌으로 옮겨놓았다. 내가 쓸 수 없는 글이기에 가지게 되는 질투심이라고나 할까?



[카이져 야구스페셜]우리가 페드로에 열광하는 이유는?

[카이져의 야구스페셜]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 그가 돌아온다. 복귀를 위한 시뮬레이션 피칭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페드로의 팬들은 벌써부터 흥분과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특히나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선수다. 물론 미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선수지만 한국에서 페드로를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


" 현역 투수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수는 누구인가? " 라는 설문이 미국 현지에서 행해진다면 페드로가 로져 클레멘스와 그렉 매덕스 그리고 랜디 존슨을 제치고 1위를 할 확률은 거의 없다. 단순히 인기투표를 한다고 하더라도 도미니카 출신의 흑인 페드로가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 투수라는 이점을 지니고 있는 저들을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라면 두 투표 모두 페드로가 넉넉하게 1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한국의 팬들은 페드로 마르티네즈라는 투수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통산 206승 92패 방어율 2.81의 뛰어난 성적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듯하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페드로 마르티네즈라는 투수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일까?



▷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실력이 없이 슈퍼스타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페드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의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3번의 사이영상(그 중 두 번은 만장일치), 트리플 크라운(1999년), 리그 방어율 1위 5회, 탈삼진 1위 3회, 현역 선수 중 통산 방어율 1위(2.81), 200승을 달성한 투수 가운데 역대 승률 1위(.692), 올스타전 4타자 연속 삼진 등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자이언츠, 에인절스 그리고 양키스 등에서 뛰며 통산 350홈런 1372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한 칠리 데이비스에게는 한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 1999년 양키스 선수로 은퇴 시즌을 마감하고 있던 데이비스는 9월 10일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6번 타자로 나서서 2회에 솔로 홈런을 때린다. 그리고 그 홈런은 그 경기에서 양키스가 기록한 유일한 안타였다.


9이닝 1피안타 1실점 17삼진 완투승! 보스턴 선발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그날 경기 성적이었다. 120구를 던지는 동안 스트라익은 80개, 볼넷 하나 없는 완벽한 경기였다. 1회 선두타자 척 노블락의 몸에 맞는 공과 데이비스의 홈런이 아니었다면 양키스에게 사상 처음으로 퍼펙트 패배의 치욕을 안겨줄 뻔 했다. 그것도 17개의 삼진을 곁들여서.


이어서 한 달 후 레드삭스와 양키스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맞붙는다. 3차전에서 로져 클레멘스와 선발 맞대결을 한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7이닝 동안 단 2개의 안타만 허용하며 12삼진 무실점으로 팀의 13-1의 대승을 이끈다. 이 경기는 그 해 양키스가 포스트 시즌에서 당했던 유일한 패배였다.


연이은 두 번의 등판에서 자신들을 완전히 제압한 페드로를 보며 기가 질린 양키스의 조 토레 감독은 인터뷰에서, " 야구는 인간들끼리 하는 경기이므로 '인간이 아닌 자'에게 진 경기는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일이고, 따라서 자신들은 전승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 라는 말을 남겼다. 이 후 페드로의 별명은 '외계인'이 되었다.


몇 년 전에 한 메이저리그 사이트에서 빅리그 최고의 구질을 뽑는 설문 발표를 하며 재미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각 구질별로 1위부터 5위까지를 뽑는 이 설문에 많은 선수가 이름을 올렸지만 그 가운데 페드로의 이름은 없었다. 화려한 무브먼트를 자랑하는 포심과 '전가의 보도' 체인지업 그리고 무서운 위력의 커브까지도 순위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시 찬찬히 살펴봤더니 맨 마지막에 참조표시(#)와 함께 이러한 문구가 있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구사하는 모든 구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 판타지(fantasy) 스타


NBA의 앨런 아이버슨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단지 그의 실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80센티의 단신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폭발적인 득점력과 게임을 지배하는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아이버슨은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키가 커야 유리한 스포츠에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최고의 반열에 오른 아이버슨은 인간승리의 표상이다.


종목의 특성은 다르지만 키 큰 선수가 유리하다는 면에서 현대 야구는 농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랜디 존슨(206센티), 로져 클레멘스(193), 존 스몰츠(190), 커트 쉴링(193), 자쉬 베켓(193), 제이슨 슈미트(195), 크리스 카펜터(198), 로이 할라데이(198), 카를로스 잠브라노(195), C.C. 싸바시아(201), 브래드 페니(193), 케리 우드(195) 등 내 노라 하는 파워피처들을 보면 하나 같이 190대의 장신들이다.


비교적 키가 작은 180대 초반의 선수들은 어쩔 수 없이 기교파 투수로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만능형 투수였던 그렉 매덕스(183)는 제외하면 탐 글래빈(185), 케니 로져스(185), 제이미 모이어(183) 등은 기교파 투수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성공한 몇 안 되는 케이스다.


심지어 지난 60년간 6피트(183) 미만의 키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투수는 양키스 소속으로 6번이나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던 화이티 포드(178, 236승 106패 방어율 2.75)뿐이다. 대부분의 키 작은 강속구 투수들은 파워피처로의 길을 포기하고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을 모색해야만 했고, 그 또한 성공 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실정이니 공식 프로필에 키 5피트 11인치(180) 몸무게 170파운드(77kg)로 나와 있는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그 존재 자체가 신기할 수밖에 없다. 동갑내기인 '마무리계의 페드로' 빌리 와그너(178)를 비롯해 뒤이어 등장한 로이 오스왈트(183)와 요한 산타나(183), 그리고 올해 데뷔한 신인 팀 린스컴(178) 등도 마찬가지로 180안팎의 키로 불같은 강속구를 구사한다.


같은 힘이라면 키가 큰 투수가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 위치에너지와 원심력 등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온 몸의 탄력을 모두 이끌어 내는 투구 동작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투구 폼은 바람직하다 볼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들의 뒤에는 항상 '부상의 위험'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가냘픈 체구지만 100마일의 포심을 뿌리는 와그너에게 전문가들은 항상 투구 폼을 바꿀 것을 권유했고, 이렇다 할 부상 경력도 없는 린스컴은 단지 키가 작다는 이유 하나로 드래프트 최대어로 꼽혔음에도 불구하고 10순위까지 밀렸다. 필자도 요한 산타나가 투구 동작 이후 자세가 무너지는 약점을 하루 빨리 극복하지 못한다면 3년 내에 부상으로 신음하게 될 것으로 본다.


페드로 마르티네즈도 작은 체구 때문에 부상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토미 라소다 전 다져스 감독에게 버림받고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트레이드 된다. 물론 라소다 감독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페드로는 몸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시기가 틀렸다. 트레이드 된 이후 10년 동안 큰 부상 없이 커리어를 이어온 페드로는 이미 그 10년 동안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섰다.


'제국'이라 불리는 양키스에게 항상 눌린 보스턴의 선수로서 그들과 싸워왔고, 실제로도 양키스의 가장 큰 위협이 된 선수 페드로 마르티네즈. 2004년 마침내 보스턴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에서 시리즈 전적 3: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4차전부터 내리 4연승 하며 양키스를 물리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 마침내 86년 묶은 오랜 한을 푸는 데 성공한다.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그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실제로는 180센티도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페드로가 97마일의 강속구와 함께 메이저리그 최고라 평가받는 각종 구질들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모습은,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판타지 스타' 그 자체였다. 이 점이 한국의 팬들에게 가장 크게 어필했을 것이 분명하다.



▷ 부상... 부상... 부상...


조만간 페드로가 복귀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다. 자신은 '더할 나위 없이 몸 상태가 좋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어깨 회전근 수술을 받고 1년 만에 복귀하는 페드로, 어깨 부상이 밝혀지기 전에 이미 오른쪽 종아리와 허벅다리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을 들락거렸고,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경우는 완치가 불가능하다.


작년 페드로의 투구를 본 팬들이라면 누구나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패스트볼 최고 구속은 90마일에 불과했다. 물론 제대로 제구 되었을 때는 여전히 위력적이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그러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1년 반 만에 찾은 펜웨이파크에서는 상대팀 선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투구는 보스턴 시절의 그것이 아니었고, 결국 옛 동료들에게 난타당하며 3이닝 동안 8실점한 후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만다.

그 경기부터 시작해 부상까지 겹친 페드로는 후반기 7경기에서 31이닝동안 무려 28실점(27자책) 방어율 7.84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겼다. 뉴욕 메츠로 이적한 첫 해 다시금 2점대 방어율(2.82)을 기록하면서 다시금 페드로의 시대가 열리나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들었지만, 작년은 부상과 부진이 이어지며 생애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만 것이다.


페드로는 작년에 얼핏 자신은 2008년을 끝으로 은퇴할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부상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할 것을 우려했음일까? 이번의 복귀에서 만족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의 말은 사실로 다가올 수도 있다.



▷ 역대 최고가 되기 위해서


누군가 필자에게 현역 투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를 뽑으라면 주저 없이 그렉 매덕스의 이름을 언급할 것이다. 가장 뛰어난 파워피처의 이름을 묻는다면 로져 클레멘스라고 답할 것이며, 가장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했던 투수는 랜디 존슨이라고 답할 것이다. 활동 기간이나 쌓아온 업적을 봤을 때 페드로가 이들 세 명 보다 더 위대한 투수로 기억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러한 필자조차도, 모두가 전성기라고 가정할 때 월드시리즈 7차전 선발 투수로 누구를 내세우겠느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매덕스의 등판 경기에서는 상대 타자들의 무기력함이 보이고, 클레멘스의 경기에서는 우완 정통파 파워피쳐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랜디 존슨에게서는 압도적인 투구란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


페드로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라운드에 나와 있는 선수들 중 가장 작은 키였던 페드로였지만, 마운드에 서 있을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큰 거인으로 보였던 선수가 바로 페드로다.


페드로가 전성기 시절 보여준 임팩트는 5년 이라는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보여준 샌디 쿠펙스를 비롯해, 현역이면서 이미 역대 탑 10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린 매덕스와 클레멘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아니 99-00년도에 걸쳐 2년 동안 보여준 그의 엄청난 성적은 94-95년의 매덕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의 비교도 불허한다.


이미 그는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샌디 쿠펙스가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를 역대 최고의 투수로 언급하는 이는 거의 없다.(오히려 ESPN의 유명한 칼럼리스트 제이슨 스탁스는 그의 저서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좌완투수로 쿠펙스의 이름을 거론했다)


'최고' 라는 단어는 단기간의 임팩트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온 업적까지 함께 남긴 선수에게 어울리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올해 36살인 페드로 마르티네즈에게도 아직은 기회가 있다. 45살의 클레멘스와 44살의 존슨의 예에서 보더라도 페드로가 이들처럼 못할 이유는 없다. 그는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정교한 컨트롤과 뛰어난 변화구를 지니고 있다.


'탐 글래빈 이후로 300승 투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금 페드로가 기적처럼 부활에 성공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300승을 돌파한다면 그 때는 그의 이름 앞에 '역대 최고' 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200승을 달성한 페드로는 3000탈삼진(역대 14번째)에 단 두 개만을 남겨두고 있다. 덕분에 이번 페드로의 복귀 등판은 축제가 될 전망이다. 그 축제가 계속 이어져서 다시금 페드로가 인간승리의 표본으로 우뚝 설 수 있을지는 그 자신에게 달렸다.


라이벌 애틀란타가 마크 테익세이라를 영입하는 등 전력 보강에 열을 올리는 동안 메츠는 페드로를 기다리며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페드로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복귀한다면, 많은 팬들이 바라는 것처럼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의 두 주역인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커트 쉴링이 올해 월드시리즈에서 맞대결 하는 장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찬호로 시작된 메이저리그 열풍이 한국에 불어온 그 시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페드로 마르티네즈. 그가 계속해서 메이저리그의 '작은 거인'으로 남아 그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가 섞인 가운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만한 투수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글쓴이 블로그 : http://blog.daum.net/pride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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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otzky
  꽤 예전에 프리챌 쪽의 대학야구동아리 연합회 커뮤니티 쪽에 심판섭외 건이 언급되었을 때 작성했던 글입니다.
  그쪽에 그냥 놓아두고 방치하기에는 지금도 제 자신에게 생각할 바가 여럿 느껴지는 바가 있어 제 블로그에도 옮겨놓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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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이곳에 글을 끄적여 보는군요. 뭐 이제 기억에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시는지도 모를 일이겠지만요.

 

  모처럼 이곳에 들어와 보니 [예상맨들의 자리] 게시판에 2006년도는 심판을 섭외해서 쓰는 것이 어떻느냐는 글이 올라왔더군요. 그리고 그에 대한 댓글들에서 여러 견해들을 볼 수 있었고요.

 

  그런데 그 본문을 쓴 분의 비용산정을 보니 심판아카데미 쪽의 심판비를 생각하신 것인지, 아니면 서울권에서 거리가 조금 떨어진 지역의 심판비용을 산정하신 것인지 상당히 거리감이 멀게 느껴지네요. 제가 소속되어 있는 [국민생활체육 야구연합회](솔직이 간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간판이 있는 심판 중에도 자격미달인 이들도 분명 있다고 보고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분들 중에도 뛰어난 분들이 있을 테니까요. 물론 개인자격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은 동료들과의 절차탁마하는 과정이 적다 보니 기량의 유지가 쉽지 않은 어려움은 있겠죠.)의 경우는 그 글에 씌어진 비용보다 높은 비용이 요구됩니다. 일요일의 거의 하루 종일을 나가서 있어야 하는데 따르는 체력부담에 차량이동자의 경우 발생하는 소요비용 등을 고려하고 단순한 일용직 노동자의 개념이 아니라 남들 쉬는 휴일에 쉬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플레이에 대한 재정을 내려야 하는 일의 특성 상(즐기니까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시면 이젠 인상이 좀 찌푸려집니다. 양해하시길) 경기 중 불거질 우려가 있는 시비에 휘말리며 -- 열심히 하는 이들도 피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죠 -- 스트레스를 만방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적은 비용에 그러고 싶은 이들은 거의 없겠죠.

 

  서울권에서 활동하는 다른 조직의 심판부들도 큰 차이는 없다고 보입니다. 오죽하면 고교 전국대회의 시도지부 예선, 그 중에 서울시 예선을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 산하 서울시 야구협회 심판부에서는 사회인야구를 진행하다 시달리게 되는 판정시비에 대한 고충까지 일정부분 비용으로 환산해서 리그 측에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말 다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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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도, 아니 거의 매해마다 불거지는 심판에 대한 불만들에 대해 저도 거의 매해마다 끄적여 온 내용을 또 끄적여야 겠군요. -- 이 점이 얼마나 현재의 동아리 야구계의 헛점을 잘 보여주는지 알아 두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비용을 들여 외부 심판을 초빙하는 것도 동아리의 재정 상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아리 구성원 대다수에게 제대로 된 규칙 교육과 심판으로 경기에 투입되었을 때 어느 정도의 자질과 노력, 성의를 보일 이들을 키워 내야 한다는 것 말이죠. 항상 써 왔던 이야기이지만 한 해만 지나면 다 지나가 버린 기억이 되어 버리고 다음 시즌이 되면 또 전년도의 상황을 전혀 전달받지 못한 이들과 또는 신규 가입 학교의 구성원들이 "속된 표현으로 깽판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것을 보면서 근 10년 가까이 졸업 후 외부에서 바라보는 이의 심정으로 애가 타는군요.

 

  지적하자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또 나오게 될 테고, 자칫 쓰다가 감정에라도 휘말려 버리면 그 대상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비난글이 될 우려가 있기에(이미 그런 우려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예전의 기억에서 상세한 사례를 끄집어 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지만, 부탁드리건대 심판을 내보낼 이에게 "기본적인 요령" 과 "금기사항" 및 "주의사항"을 숙지시켜 내보냈으면 합니다. 이런 이야기 하는 것도 이젠 지치려고 하네요. (도대체가 몇 년 째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안 바뀌는 걸까요?)

 

  만약 제가 지닌 과거의 기억에서 상세한 사례를 언급하길(설령 그 사례로 욕먹을 이가 있다 한들)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개선을 원한다면 기존의 폐해에 대한 뼈아픈 자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니 그러한 부분에 대해 혹시 마음에 찔려 할 분이 계시다면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는 일일테죠. 만약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저 "외부심판을 쓰지 않고 내부에서 소화할 경우" 에 대해 보다 더 신중하고 성의있는 공부를 통해 심판을 보도록 학생들 내부의 자정 작용이 있었으면 합니다.

 

  [경기결과]를 보면서 그저 심판을 본 학교의 이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만 글을 남겨놓는 것이 그들이 결코 그 경기에 대한 성의있는, 제대로 된 판정과 경기운영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간의 경험(얼마 안 되지만) 을 통해 대략 짐작을 합니다. 이는 현재 동아리들의 구성원 중 일부인 선수출신인 사람들도 벗어날 수 없는 비판이 되겠죠.

 

  글이 적잖이 격해진 듯한 느낌이군요. 미리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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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otzky
  비나리 님의 블로그 글을 읽고 "과연 대통령이 직접 쓴 글은 어떤 것일까? 정녕 그렇게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글일까?" 하는 심정으로 청와대 사이트에 들어가서 퍼옵니다. 분석의 틀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유용한 일이길 바랄 뿐이라죠.(읽을 시간이 있을까의 문제도 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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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요즈음 소설을 읽거나 TV드라마를 보면서, 아내에게 “작가는 참 좋겠다.” 이런 푸념을 곧잘 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비판이나 논쟁을 보면서도 역시 ‘학자들은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학자는 말하는 사람이고, 집권한 정치인은 실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제약이 없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논리구조의 제약은 있겠지만, 현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현실의 중요한 변수를 외면할 수도 있고 자유로이 온갖 가정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는 사람은 상황의 제약을 단 하나도 도외시 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가정을 동원할 수도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장기적인 전략으로, 또는 의제화·담론화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당장의 가능성이 낮은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각오해야 합니다.

  신문에서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분들 간의 논쟁을 보면서 난감함을 느낍니다. 사실에 대한 인식이나 논리 모두 할 말이 있으나, 논점이 너무 많고 어려운 전략논리와 개념을 사용하고 있어서 일일이 반론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저의 경험에서 시작하여 몇 가지 의견과 생각을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고시합격을 위해 유신헌법을 공부했습니다. 한때 이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유신헌법 책을 쓴 학자들도 민주주의의 원리에 관하여는 소상하게 써놓아서, 민주주의를 받치고 있는 상대주의 철학을 접할 수는 있는 기회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일생동안 저의 생각을 지배하는 철학이 됐습니다. 저는 이것을 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신과 5공은 저에게 새로운 사상에 접할 기회와 방황할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80년대 초 변호사시절, 단지 정의감만으로 시국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많은 사회과학분야 서적과 자료를 접하게 됐습니다.
  물론 심오한 이론이 담긴 원론서도 접하기는 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종속이론, 사회구성체이론, 민족경제론,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5.18 광주 이후 계속된 당시의 숨막히는 현실이 이런 이론과 유사하다는 점에 동의하여 비타협적 투쟁을 실천도 하고 주장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원이 되고나서도 젊은 대학교수들을 모셔서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이니,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이니 하는 이론적 조류에 대한 강연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노동자 농민 서민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해 버리려 한 일도 있고, 89년 전민련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거기에 은근히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 현실은, 우리가 읽고 말하던 이론이 예언했던 방향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습니다.
  외채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했던 우리경제는 이를 극복했고, 87년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4배의 임금인상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지속하며 격차를 줄이고 있었습니다.

  진보진영은 개방을 할 때마다 “개방으로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우리경제는 모든 개방을 성공으로 기록하면서 발전을 계속했습니다. 이제는 2만불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급속한 구조조정과 97년 외환위기로 많은 국민들이 고통에 몰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정책으로 교정할 문제이지 시장경제원리나 세계화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민주진영은 단결을 내세웠지만 작은 차이로 분열하는 일도 많았고, 대의를 내세웠지만 이기주의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들어왔던 논리가 틀렸거나 현실이 논리를 배반한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저는 논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체계적으로 정연한 논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논리에 빠져 현실에 맹목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해 왔습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상체계의 완결성을 신봉하거나, 현실을 사상과 논리체계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보진영이라 하여 분명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도 아무 지적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이름을 걸고 도와주다가 ‘그것 맞느냐’고 물으면 ‘그냥 이름만 걸어준 것’이라고 변명하는 무책임도 옳지 않습니다.

  참여정부가 민심의 지지를 잃은 책임을 묻는다면 저는 그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아무 한 일도 없이 국정에 실패만 했다고 한다면,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따져보자고 말합니다. 참여정부 때문에 진보진영이 망하게 생겼다고 원망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얘기입니다. 진보진영 스스로 전체를 돌아봐야 할 일은 없을까요.

  참여정부에 진보적 정책이 없다는 비판도 사실이 아닙니다.
  참여정부 동안에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맞습니다. 저도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과거 외환위기와 가계부도라는 경제적 위기에서 심화된 것이고 참여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습니다.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4년 동안 재정에서 차지하는 복지지출 비중이 20%에서 28%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지난 어느 정부보다 빠른 속도입니다. 그리고 지방재정에서도 복지예산을 31%에서 36%로 늘렸습니다. 이것 역시 이전 정부와는 확연히 다른 점입니다.

  그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재정에서 차지하는 복지지출 비중은 유럽국가들과 비교해 절반수준에 불과합니다. 우리 정부의 공공서비스는 국민들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공공서비스로 기회가 공정하게 제공되지 못하면서 빈곤이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 복지지출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동반성장, 양극화 해소를 위해 국민총생산 대비 복지지출을 2020년까지는 현재의 미국·일본 수준으로, 2030년까지는 현재의 유럽 수준으로 높이자는 ‘비전 2030’도 이전에 없던 국가 장기발전 계획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는 저출산·고령화·양극화가 계층간 부문간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를 방치하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비전 2030’ 미래전략입니다. 이것은 혁신주도형 경제로 성장잠재력을 높이고 사회투자를 통해 동반성장을 추구하자는 전략입니다. 이에 대해 진보진영에서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가졌는지 의문입니다. 진보가 진보다우려면 미래문제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용산 미군기지가 서울을 떠납니다. 진보진영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일부는 평택기지 건설을 반대해 정부를 곤경에 몰아넣고, 이를 지원했습니다. 주한미군 나가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타당한 일이고 가능한 일입니까. 국제정치의 현실도 현실이지만, 국내 사정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가 진보진영만 사는 나라입니까. 진보진영이라고 다 미군철수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앞으로 전시작전통제권은 한국군이 단독으로 행사하게 됩니다. 단지 상징적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사시든 평상시든 남북관계나 대외관계 등 한반도 문제에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일입니다. “노 정권은 미국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었다”는 주장은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특권을 누리는 국가기관은 지금 없습니다. 권력이 합리화되고 정경유착이 끊어졌습니다. 정치와 권력뿐만 아니라 시장과 사회의 투명성이 높아졌습니다. 공정한 경쟁의 규칙이 확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도 해소되었습니다.

  언론권력은 여전히 막강하지만 권언유착의 근절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됐습니다. 언론의 행태도, 언론을 보는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참여정부가 끝나면 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부 언론권력도 참여정부에서는 한 발도 물러설 수 없을 것이나,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행태를 계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하다가는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참여정부 동안에는 ‘앞으로 계속 그래서는 곤란하다’는 학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 불만을 가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어떻든 이것은 이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진보진영이 보기에는 이 모두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까?

  이라크 파병, FTA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사실은 인정합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따질 것은 따지는 것이, 지식을 가지고 논리를 말하는 사람들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 ‘지역주의가 별 문제 아니다’거나 ‘일부 언론권력, 정치언론의 횡포가 별 것 아니다’는 논리까지 나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여정부는 지금도 지역주의, 언론권력과 싸우고 있을 뿐, 책임모면이나 ‘알리바이’를 위해 지역주의나 언론 이야기를 한 일은 없습니다.

  참여정부가 진보진영의 비주류라서 실패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견입니다. 오래전 저는 어느 모임에서 진보진영의 학자 한 분에게 “나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 대통령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했던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참여정부를 매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그 분은, 그 때 “그럴 것”이라고 상당히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런 제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려운 처지의 저와 참여정부를 흔들고 깎아내리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나 일부 정치언론이 말하는 그런 좌파도 아닙니다. 저는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지만, 무슨 사상과 교리의 틀을 가지고 현실을 재단하는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개방도, 노동의 유연성도 더 이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 효용성의 문제입니다.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하는 방향으로 가는 시대의 대세는, 중국의 지도자들도 거역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마당에 개방을 거부하자는 주장이나 법으로 직장을 보장하자는 주장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난 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입니다.

  비판 가운데엔 ‘진정성’이라는 말과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까지 시비가 돼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엉뚱한 오해입니다.
  청와대는 정권에 대한 평가에 대해 책임회피를 하자고 진정성이라는 말을 쓴 일은 없습니다. 개헌이 정략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의 와중에서 누군가가 진정성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고 청와대도 이 말을 따라 쓴 모양이나, 이것을 가지고 청와대가 진정성을 내세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우스개 표현마저 심각한 논란이 되는 현실은 비극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한 것은, 참여정부를 굳이 교조적인 이념의 틀에 가두어 놓고 두드리려는 의도로 한 쪽에서는 ‘좌파정부’라 비난하고, 한 쪽에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비난하는 상황이 못마땅하여, 이런 비판을 교조적 논리라고 비꼬아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두고 언론이 진지한 표정으로 무슨 뜻이냐 묻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는 바람에 난감한 기분이 든 일이 있습니다. 이제는 학자들마저 이 말을 정색하면서 받아들이고 무슨 의미를 붙이니, 입장이 참으로 난처합니다.
  다시 한 번 더 밝힙니다. 이 말은 참여정부를 교조적 사상으로 재단하는 현실을 비꼬아서 쓴 말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니 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우리 진보가 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필요하면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채택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유럽의 진보진영은 진작부터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참여정부의 노선은 이런 것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유연한 진보’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교조적 진보’에 대응하는 개념이라 생각하고 붙인 이름입니다.

  저 때문에 진보진영이 다음 정권을 놓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정권에 대한 지지가 다음 정권을 결정한다면, 지난번에도 정권은 한나라당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저는 다음정권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일도 없습니다. 저 또한 대세를 잡고 있지 못한 지금의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 민주 혹은 진보진영이 성공하고 안 하고는 스스로의 문제이고,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저에게 다음 정권에 대한 책임까지 지우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차라리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진보진영이 행동하기 좋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진보진영이 무엇을 잘하자는 것이 아니라 반사적 이익을 보자는 것입니다.
  진보진영이 무엇을 잘해서 정권을 잡을 일이라면 참여정부 시대에도 잘 할 수 있는 일이고, 반사적 이익을 보겠다는 말이라면 다음에도 기회는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거기서 더 나아가 민주세력 무능론까지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대단히 부당한 논리입니다. 과거의 군사정권과 비교해서 무능하다는 것인지, 다른 나라 민주세력과 비교해서 무능하다는 것인지 기준을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민주화 이행과정에 있어서 갈등과 혼란이 적지 않았습니다만, 이것은 어느 나라고 할 것 없이 사회변동과정에서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87년 이후 우리나라가 이룬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전 세계 사람들이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난 20여년 민주주의를 주도하고 경제발전을 이끌어 온 민주진영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지지도가 낮다고 하여 민주세력 무능론까지 대두되는 최근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가 근거와 논거를 갖춰 이뤄지길 바라는 것과 같이, 민주세력의 공과(功過) 역시 시대적 요구를 중심으로 비교의 기준과 사실적 논거를 갖고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민주화와 사회발전 과정에서 생긴 분열과 좌절의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아직 분열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차이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민주화 과정 20년의 한 획을 긋는 나름대로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난 4년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보람과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진보진영의 논쟁이 서로가 책임을 다하는 범위 안에서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냉정하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2007.2.
대 통 령 노 무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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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rotzky
교사도 우울하다.
유영미 (고교 교사) / 녹색평론에 실린 글



25년 전 내가 첫 발령을 받을 때만 해도 남학생들은 교직을 탐탁해 하지 않아 다른 데로 진출할 만큼 교직은 보수도 짜고 사회적 지위도 낮은 천직(賤職)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공격 앞에서 나라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위태로워지고 고용불안이 일반화되면서 교직은 안정적이고 보수도 괜찮은 직업으로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더니 급기야 철밥통이라는 아주 조소어린 명예(?)까지 얻기에 이르렀다

예전에 산업 분류에 대한 수업을 하면서 선생님을 서비스산업 종사자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참 당혹스러운 때가 있었다(지금은 정말 말 그대로 되고 말았지만) 교육 인적 자원부라는 말처럼 모든 걸 경제적 시각으로 표현하는 자본주의적 발상의 천박함을 그 땐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긴 했었다

그러더니 이제 아이들 앞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보고 철밥통이라고 하고 아이들이 제 선생을 고발하는 걸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란다

물론 교사들이 그 권위를 이용하여 교활하게 아이들을 볼모로 삼아 학부형과 아이들에게 저질러 온 비인간적 폭력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고 사라져야 하겠지만 그 방식이 기껏 아이들 앞에서 교사를 모멸적으로 짓밟아놓는 길이었다니......

무엇보다도 그렇게 될 경우 교사가 받는 상처보다 아이들의 영혼이 일그러지며 생기는 상처가 훨씬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 것일까.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어리석음과 다를 게 무엇이랴

그러나 사실 요즘 교사로서 나를 가장 우울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종철 선생님이 환경파괴보다 더 무서운 것이 경제성장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라고 자주 걱정스럽게 얘기하시곤 하는데 실제로 학교에서 무섭게 변해가는 아이들을 두렵게 지켜보아온 나로서는 그것이 단지 노파심에 의한 걱정이 아님을 안다

해마다 2월이면 새로 상급학교를 배정받은 신입생들이 등록을 하러 학교에 온다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둘러보는 그 아이들은 낯선 곳에 들어온 이가 가지는 수줍고 조심스러운 낯빛을 하고 화장실을 물어보거나 했다. 아이고 이놈들 또 나랑 한참 싸우고 정들 놈들이구만 이런 생각으로 그 귀여운 모습들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풍경은 접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입학을 앞둔 아이들이 예비소집으로 학교를 구경하는 건 똑같지만 그 놈들이 예비신입생인지 그냥 다니던 재학생인지 구별이 힘들어질 정도로 처음 와보는 학교를 마치 제집 안방인 것처럼 휘젓고 다니며 아무 경계심도 없이 큰 소리로 떠들고 학교 후졌다고 흉보고 하는 아이들만 발견될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면서 아이들의 변화가 조금씩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 사오년 전부터는 아이들을 볼 때면 외계인들 속에 내가 끼어있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분명히 같은 한국 사람이고 같은 한국말 쓰고 그러는데 대화가 겉도는 것 같은 느낌, 내 얘기가 저 사람의 가슴에 들어가 앉지 않는다는 느낌, 도대체 언어의 공유는 되나 정서의 교감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 느낌의 원인이 무얼까 하고 혼자 당혹해 했다

복도를 지나쳐 갈 때 아이들의 인사를 받다보면 (물론 고개 숙이는 애들 거의 없지만) 간혹 아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을 때도 웬지 백화점에서 절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마네킹처럼 기계적으로 고객을 향해서 필요이상의 예의를 차려 인사하는 백화점 점원들의 인사처럼 알맹이가 없는 공허한 몇 마디 말이 다이다

자신의 점수를 쥐고 있는 선생에 대한 계산된 예의 차원에서 나온 인사이기 때문이라 그럴까? 쾌활하게 큰 소리로 인사는 하지만 녹음된 것 잠시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다. 간혹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이 묻어나는 인사를 받으면 정말 고맙다(사실 이게 선생 하는 맛인데. 힘들어도 선생 하는 건 애들 예쁜 맛 그거 하난데 말이다)

더욱이 학년이 바뀌고 더 이상 수업에서 만나지 않게 되면 아이들은 요즘 말로 거의 완벽하게 생깐다(모른 척 하고 무시한다)는 것이 여러 교사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아는 아이를 발견하곤 반가움에 내 얼굴 표정이 웃음으로 바뀌려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애들 앞에서 느끼던 그 당혹스러움이란......

물론 이런 현상이 이 학교의 지역적 특성 때문일 수도 있으나 곧 다른 지역으로도 서서히 퍼져 갈 것이 분명해 보이니 걱정이다

한편으론 어쩌면 이 아이들이 엄마들의 영향을 받아 교사에 대